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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를 꿈꾼다 - 예술적 인문학 그리고 통찰 : 심화 편
임상빈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0년 7월
평점 :
『예술은 우리를 꿈꾼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과 '예술적 인문학 그리고 통찰'이라는 거창한 부제, 그 뒤에 붙은 '심화 편'이라는 말, 꽤 두꺼운 책의 두께까지 이 책이 어렵고 심오할 것이라는 인상을 굳힌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정반대다.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예술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되는 것, 일상에서도 예술을 누리게 되는 것. 그러기 위해 저자는 '예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어떻게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까', '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차근차근 풀어간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지 않고 상호 간의 생산적인 자극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설명과 대화 형식을 모두 사용했다고 하니, 나도 내 친구 H와의 대화를 통해 이 책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 미술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수장고 안에만 넣어두고 전시는 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에는 의미가 있을까?
H: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 그렇지. 예술 작품은 보여주기 위한 거니까. 이 책에서는 예술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전시, 재현, 표현이 있다고 해.
H: 그 셋은 어떻게 다른 거야?
에드 루샤, <스탠더드 주유소 연작>, 1960년대.
나: 우선 전시는 '이건 내 작품이다, 봐' 하는 거지. 겉으로 보이는 걸 그대로 전달하는 거. A는 A다. 이 그림들은 미국의 팝아트 화가 에드 루샤 Ed Ruscha 가 그린 <스탠더드 주유소> 연작인데, 서로 비슷비슷한 미국의 주유소들을 비슷한 구도로 특색 없이 그려놨어.
H: 의미라고는 딱히 없다, 그냥 미국에 널리고 널린 주유소일 뿐이다, 이 얘기네. 관람객들이 괜히 의미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그럼 재현은?
필립 드 샹파뉴, <바니타스 정물화>, 1671.
나: A는 B다. 이 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 해골은 죽음의 상징, 이런 식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된 상징들을 가지고 의미들을 나타내는 거지. 17세기 서양에서는 '바니타스vanitas'라는 정물화가 유행했는데,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공허함'이라는 뜻이야. 이 세상의 무상함을 시들어 버리는 꽃,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시간의 유한함을 뜻하는 모래시계 같은 정물들을 모아 재현한 거지.
H: 꽃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그리려는 대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게 재현인 줄 알았는데.
나: 물론 그것도 재현이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는 예술의 재현은 그래.
H: 그럼 표현은?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의 세부
나: 이 사진을 봐.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일부를 클로즈업한 건데, 물감 덩어리를 짓이겨 놓은 것처럼 강렬한 붓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타내는 게 표현이야.
H: 그럼 표현은 재현보다는 개인적인 거네. 화가 A와 B가 재현은 비슷하게 할 수 있어도 표현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나: 그렇지. 이 책에서는 예술가가 그 표현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우선 다양한 도구로 표현해 볼 수 있다고.
H: 유화 물감을 붓에 묻혀서 캔버스에 그리는 거 말고 다양하게? 수채화도 있고 아크릴 물감도 있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더라.
임상빈, <가정용 랩 1>, 2001.
나: 그것뿐만 아니라 기술이 발전되고 현대 미술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것의 폭이 넓어지면서, 별에 별 재료들이 다 미술 재료로 사용될 수 있대. 이 책을 쓴 작가는 2D 스캐너로 자기 몸이나 여러 가지 물건을 스캔한 이미지로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 이 작품은 집안에서 쓰는 랩을 스캐너로 스캔해서 만든 거래.
H: 캔버스에 검은 칠을 하고 하얀색 물감으로 물결이나 외계 행성을 그린 거 같은데. 추상화 같기도 하고. 현대 미술에서는 이런 재료로도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나: 응, 그래서 작가는 요즘 미대에서 전통적인 도구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해.
H: 입시 미술에 길들여진 애들한테 갑자기 자유를 주니까 그렇지. 정해진 공식에 맞춰 그림을 그리다 이제 와서 마음대로 해 보라면 당황스럽지. 그리고 취업을 하려면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그림을 그려야 되지 않을까?
나: 응, 그건 작가도 인정하지. 전통적인 도구로 전통적인 재현 방법을 익히는 건 일종의 보험이라고. 하지만 관습은 깨라고 있는 거고 모든 게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해.
H: 그 부분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부분이네. 일반 독자들보다는.
나: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긴 했는데, 전공자만 미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취미로 미술을 하는 사람도 관습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지. 미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엿볼 수도 있고.
'우리는 어떻게 예술 작품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해. 우선 도상 해석.
'도상 해석'은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 그 문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읽어내는 거야.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까 젊은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서양 명화를 보면 그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거라는 걸 알잖아. 그런데 시대가 지날수록 아기 예수는 그냥 몸만 작은 어른처럼 권위 있어 보이는 모습에서 그냥 인간 아기처럼 연약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변화한대. 이렇게 여러 시대에 걸쳐서, 아니면 같은 시대의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 속 한 도상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건 도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지.
H: 그건 우리 같은 일반 관람객이 아니라 미술사학자들이 연구하는 방법인 거 같은데.
나: 또 다른 방법인 '지표 찾기'는 미술사학자보다는 탐정이 추리하는 방식에 가까워. 다른 사람들이 놓친 단서를 미술 작품 속에서 찾는 거지?
H: 예를 들면?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1476.
나: 이 그림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인데, 이 그림 속에 보티첼리 자신의 자화상을 숨겨뒀어.
H: <프리마베라>로 유명한 그 화가? 이 많은 사람 중 누가 보티첼리인지 어떻게 찾아내?
나: 이런 경우 화가는 보통 관객과 눈을 맞추는 모습으로 자기를 그려넣는 경향이 있대.
H: 그럼 그림 왼쪽에 빨간 옷을 입은 갈색머리 남자?
나: 아니. 맨 오른쪽에 누런 옷을 입은 남자.
H: 이런 단서를 모르는 보통 관람객한테는 불리한데.
나: 그림들을 많이 보고 미술에 대한 책도 많이 읽다 보면 이런 단서들을 얻게 돼. 이렇게 작가들이 카메오마냥 자기를 그림에 끼워넣는 것 말고도 작가 특유의 필치로 누가 그렸는지 알아내는 것도 지표 찾기고. 이 그림은 반 고흐 그림이다. 이 그림은 모네 그림이다. 붓 터치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표상. 표상은 누군가의 생각과 바람, 목적이 반영된 기호인데 그걸 읽어내는 거지. 표상에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있어. 상징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A는 B다, 하고 딱 정해 놓는 거. 하트는 사랑이고 해골은 죽음이다 이런 식으로.
H: 알레고리는 어떤 건데? 안 그래도 상징이랑 알레고리가 헷갈리더라고.
나: 자기만의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도상들을 조합해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거. 아까 봤던 바니타스 정물화도 알레고리야. 허무함을 상징하는 여러 도상들을 모아놔서 '인생의 허무함을 알고 인생의 유한함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거지.
H: 자신만의 의미라기에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거 같은데?
나: 응. 사실 상징에 가깝기도 하고. 이런 걸 전통적인 알레고리라고 해.
H: 그럼 화가가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낸 알레고리로는 어떤 게 있어?
왕광이, <샤넬 No.5>
나: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 화가 중 왕광이라는 사람이 있어. 위에서 보다시피 이 사람은 공산당을 선전하는 사람들과 서구 자본주의 거대 회사의 로고를 한 화면에 그려.
H: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여 있는 지금의 중국을 나타낸 건가?
나: 그렇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적용되는 지금 중국 사회의 모습. 절대 공존할 수 없었던 두 가지가 섞여 있는 현실을 사회주의를 나타내는 단체 인물화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거대 회사 로고를 합쳐서 나타낸 거야.
H: 이렇게 예를 들면서 얘기하니 좀 이해가 된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예술에 대한 얘기를 꽤 많이 담고 있는 책인가 보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너의 감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 개인사가 많이 섞이고 좀 더 가벼운 『미학 오디세이』?
H: 네 설명에서는 작가 개인사 얘기가 별로 없던데?
나: 작가 개인사는 걷어내고 책에서 설명하는 몇 가지 개념들만 얘기했으니까. 일상적인 개인사에 빗대서 얘기하니 이해에 도움이 되긴 하는데, 좀 더 정리됐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거지. 작가의 너무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들여다보는 느낌?
H: 난 굳이 듣고 싶지 않은데 상대방이 자기 애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오늘은 걸음마를 했어요, 오늘은 엄마라고 했어요 뭐 이런 얘기를 하는 느낌? 자기한테 제일 친숙한 거에 빗대서 설명하는 것도 이해되는데 읽는 네 입장도 이해되긴 해.
나: 뭐, 일상과 연관시켜 설명하니 이해는 잘 되긴 했어. 작가와 부인이 티격태격하면서 생각을 주고받는 것도 나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고. 제목이나 부제만큼 엄청 심오한 책은 아니지만 예술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지고 감상되는지 알아두면 좋은 개념들은 깔끔하게 잘 정리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