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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정원 - 명화를 탄생시킨 비밀의 공간 ㅣ 정원 시리즈
재키 베넷 지음, 김다은 옮김 / 샘터사 / 2020년 7월
평점 :
날짜로는 봄이지만 테라스에 화분들을 내놓을 때는 아직 되지 않았다. 그 대신 테라스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터에는 매화꽃이 반쯤 피어났다. 다음 달 초에는 동네 곳곳에 벚꽃이 필 것이다. 이렇게 동네 전체가 내 정원인 양 꽃 피는 풍경을 즐기고 있지만,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지 그 안에서 쉴 수 있는 나만의 정원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자기 정원을 갖고 있었고 그 풍경을 직접 그림으로 담아냈던 화가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들의 행복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책이『화가들의 정원』이다. 이 책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들이 직접 가꾸고 그 안에서 쉬고 작품을 만들었던 정원을 사진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위) 덴마크의 화가 P.S. 크뢰이어의 작품 <장미들>. 이 책의 표지 그림으로 쓰였다.
(아래) 영국의 화가이자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버드나무 잎 무늬 벽지. 이 책의 면지에서 활용되었다.
『화가들의 정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원 같다. 표지부터 하얀 장미들과 초록색 잔디, 그 위에 비치는 햇살로 가득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덴마크 화가 P.S. 크뢰이어의 그림 <장미들>이다. 종이의 결이 그대로 보이는 약간 거친 질감의 표지 덧싸개는 캔버스를 연상시킨다. 표지를 지나면 19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공예가였던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버드나무 가지 무늬가 프린트된 면지가 나타난다. 면지의 버드나무 숲을 지나면 화가들이 자신의 정원 풍경을 그린 그림들과 과거의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 현재의 모습을 담은 컬러 사진들이 펼쳐진다. 책 전체가 그려지거나 사진으로 찍힌 꽃과 나무로 가득하다. 다른 책들보다 가로로 더 길쭉한 판형은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긴 풍경화들과 풍경 사진들을 싣는 데 적합하다.
클로드 모네의 수경 정원 풍경. 모네는 수면에 반사된 빛을 포착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수련을 비롯한 수경식물들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수면을 가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했다.
클로드 모네, <수련이 핀 연못>, 1899. 모네는 정원의 수련이 핀 연못을 자주 그렸다. 이 그림에는 모네가 1895년 설치한 일본풍 다리도 그려져 있다.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라 조경 전문가가 쓴 책이지만 미술사 쪽으로도 설명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앙리 마티스를 ‘추상화가’, ‘유명한 화가가 아닌 화가’라고 하는 것이 의아하지만(마티스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형태의 종이 오리기 작품으로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쳤지만, 본인은 구상화가였으며 피카소와 함께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칭송받는다.) 화가 한 명 한 명의 미술 경향과 작품 활동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정원이 작품 속에 담기고 예술이 정원 속으로 흘러들어가 하나가 되었다’는 서문의 문장처럼, 화가의 예술과 정원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남기며 그 화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정원은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만큼이나 그 화가의 개성과 취향을 또렷이 보여주면서, 붓과 캔버스뿐만 아니라 흙과 씨앗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데도 열중했던 화가들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이렇게 풍부한 사진과 그림,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도 화가들의 정원에 있다고 상상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있다. 우선 도판의 명도와 채도가 낮은 것이다.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를 담은 그림과 사진인데도 실제로 인쇄된 책을 보면 생각보다 색감이 어둡고 차분하다. 좀 더 선명하고 화사한 정원 풍경을 원했던 독자들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모니터와 인쇄된 지면의 색상 혼합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인쇄된 지면에서 색감이 좀 더 어둡고 차분해질 수밖에 없지만, 색을 보정하면 원래의 밝고 선명한 색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정원 관련 용어를 역주로 설명했으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포르티코, 퍼걸러, 코티지 정원, 정형 정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조경, 원예에 문외한인 독자로서 좀 더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으면 했다. 이건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지만 책에서 언급되는 식물 중에 낯선 이름이 많은 것도 내 상상을 가로막았다.
이런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출간된 지 몇 달 만에 5쇄나 찍은 것을 보면 이 책이 독자들에게서 꽤 호응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집안에 갇혀 있게 된 독자들에게는 먼 곳의 아름다운 정원을 책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될 것이다. 나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 책에 실린 정원들의 그림과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으니까. 책을 펼치고 마음에 드는 풍경을 골라서 그 안에 있다는 상상을 한다면, 화가들이 그랬듯이 잠시 동안의 평화와 휴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