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쓰인 작품을 좋게 평가하지 못할 때는 죄책감이 든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을 평가할 때 이런 죄책감을 느꼈다. 이 소설은 ‘공상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배우 강은성이 진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세상의 온갖 편견과 몰이해, 폭력에 맞서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 정말 좋은 주제이고 내가 마음 깊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소설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 소설은 메인플롯인 공상표의 커밍아웃과 사랑 이야기가 아닌 서브플롯인 공상표의 어머니 김미승과 그녀의 전 연인 양병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배우인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연예계에서 일해 오던 김미승은 동료인 양병진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양병진의 말처럼 김미승은 아들에게 줄 사랑이 너무 많아 아들을 도무지 떠나지 못했고, 양병진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아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김미승은 양병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양병진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서도 김미승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종종 그녀와 만나며 옛 감정을 떠올린다. 그는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들에게만큼 애정을 쏟지 못하는 김미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관찰자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배우자 몰래 옛 연인을 만나면서 애틋한 감정을 떠올리는 것 자체에 공감할 수 없었고, 메인플롯인 공상표의 이야기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공상표와 김영우의 사랑 이야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우선, 김영우의 구애 방식은 다소 폭력적이다. 김영우는 공상표가 게이임을 직감하고 그에게 너는 정말 게이가 아니냐, 섹스 경험은 있느냐,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냐고 집요하게 캐묻는다. 공상표 본인은 그것이 추파고 작업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 과정에서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싫지 않았다고 말한다. 공상표 본인에게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게이이든 이성애자든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례하고 폭력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겪는 갈등들이 너무 전형적이며, 두 사람의 사랑을 와 닿게 하는 디테일이 더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김미승이 양병진과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가 등 푸르고 비린 생선을 싫어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정어리와 고등어 초밥을 대신 먹어주는 것 같은 사소한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더 생생하고 개성 있게 만드는데, 작가는 그런 디테일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열등감과 세상의 편견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몰입을 방해했던 것 중 하나는 ‘게이는 여성적이다’라는 편견이 이 소설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공상표는 어린 시절 소꿉장난이나 인형놀이에 관심이 많았고, 김미승은 아들의 이런 ‘여성스러운’ 행동을 경계해 아들의 인형을 모두 버렸다. 김영우의 단편영화에서 생애 처음으로 게이인 캐릭터를 연기한 공상표는,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이 ‘게이 같은 것, 말투, 몸짓, 목소리가 남자답지 못한 것’이 싫었다고 말한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따로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는 수많은 게이들이 있고, 그들은 그저 각각의 개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를 비판하는 작품인데도 한편으로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온전히 이 소설에 몰입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몇 시간 뒤에 자신이 방화 사건으로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김영우가 마지막으로 공상표에게 문자를 보내는 장면이다. 몇 년 동안 공상표에게 다시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하다 공상표가 커밍아웃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몇 번이나 문자를 썼다 지웠다 커밍아웃을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낸다. 그러고 나서 어쩌면 공상표를 다시 만나고 그와 함께 만들지도 모를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는다. 독자들은 그의 기대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은 김영우뿐 아니라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앞으로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영화에게 애도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씌워질 온갖 편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짜 자신으로 살기로 선택한 공상표에게 응원을 보내고, 그가 앞으로 만들어갈 작품들을 기대한다.
P.S. 부록으로 실려 있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는 꽤 알차고 디테일하다. 시놉시스를 읽어 보니 흥미로운 것들도 여러 개 보여 실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