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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선언 -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
텍스트릿 엮음 / 요다 / 2019년 8월
평점 :
‘장르’란 나름대로의 서사 규칙과 관습으로 굳어진 특징들이 있어, 누구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작품을 보는 순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알게 되는 콘텐츠들, 그 콘텐츠들을 묶은 집단이다. 엘프와 마법사가 나오면 판타지, 하늘에 우주선이 떠다니면 SF, 중국을 배경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는 고수들이 나오면 무협, 이런 식으로. 2000년대 이후로는 ‘장르’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대중의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콘텐츠들을 포괄하는 의미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르 콘텐츠의 역사가 수십 년 동안 쌓여 왔고, 웹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 작품, 대중영화. 대중음악, 게임 등의 장르 콘텐츠들이 대중들에게서 큰 인기와 수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장르 문학은 문학의 ‘주류’로 여겨지는 순문학과 비교해 ‘비주류’로 여겨지곤 하고, 대중성이 강한 장르 콘텐츠들은 순수 예술 작품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받는다. 장르 콘텐츠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들의 모임 ‘텍스트릿’은 장르가 주류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미학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뜻에서, ‘비주류 선언’을 한다. 자신들이 또 다른 주류임을 외치는 ‘B급의 주류 선언’이자 ‘Be 주류 선언’이다.『비주류 선언』은 장르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 장르와 관련된 콘텐츠들을 비평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르 콘텐츠를 그저 즐길 거리로만 여기고, 진지하게 비평하거나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텍스트릿의 연구자들은 장르 콘텐츠를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가 장르 콘텐츠들을 즐기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짚어낸다. 왜 판타지 소설들은 대부분 중세시대 서양을 배경으로 할까? 중세시대 서양이 한국 사회에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거리가 멀고 낯선 세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판타지 문학 속 중세 서양은 실제 중세 서양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서양이 근대에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낯선 동양에 대한 환상을 키워 왔지만 그들이 재현한 동양은 실제 동양의 모습과 달랐던 것과 통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꿔 왔고, 픽션을 통해 현실을 탈출하려 했다. 판타지 소설 속 중세 서양은 독자들이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고 욕망을 채우는 공간이라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들에 지금의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가 한국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되짚어 본다. 이들은 장르 콘텐츠의 내용 면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장르 콘텐츠가 유통되는 방법과 매체에서의 변화를 함께 살펴보고 있다. 1990년대에는 장르 문학 작가들이 PC 통신을 이용해 자신의 작품을 연재했다. 2000년대 초반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장르 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장르 문학 작품들이 주로 개인 사이트에서 연재되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문피아, 조아라 등 기업형 웹소설 사이트들이 등장했고, 스마트폰이 발명되고 보급된 이후로는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시리즈 등의 웹소설 플랫폼들에서 장르 문학이 더욱 흥행하고 있다. 작가는 웹소설 플랫폼에 소설을 직접 업로드하면서 창작자일 뿐만 아니라 출판사와 같은 출판 주체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 매체에서의 변화는 내용 면에서의 변화까지 불러왔다. 온라인 공간에서 더 다양한 독자들과 만나게 되면서, 무협 소설은 어려운 무공의 개념을 좀 더 쉽게 전달하면서 여성 인권 신장 등 당대의 변화를 반영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렇게 내적인 측면만 분석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까지 살펴보면서 장르를 바라보는 시야를 더 넓혀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더 펼쳐나갈 수 있는 지점에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글들이 많다. 「한국형 판타지가 어색한 이유」라는 글에서는 왜 창작자들이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한국보다는 서양을 배경으로 판타지 작품을 창작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파헤쳐 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환상성이 어떤 점에서 현실의 질서와 도덕, 윤리와 맞닿아 있어 현실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독자들과 어긋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결론 부분에서 ‘잘 만든’ 한국형 판타지의 예시와 그들이 왜 성공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빈약하다.「로맨스와 페미니즘은 공생할 수 있을까」에서 저자는 로맨스가 낭만적 사랑이라는 허울을 통해 가부장제를 뒷받침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은 로맨스를 통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어내며,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연대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이 로맨스 소설에 반영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다. 그러나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이 성취하는 것은 연애 상대인 남자주인공에게 좌우되는 것인 경우가 많다. 남자주인공의 사랑을 통해 얻은 것이니 그의 사랑을 잃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로맨스와 페미니즘이 공생하려면 로맨스 소설에 강간 판타지나 폭력적인 행동이 로맨틱한 행동으로 미화되는 것 등 여성혐오적인 면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이러한 면들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좀 더 논의를 진행할 만한데 결론을 내리는 글들을 읽으면서, 지면이나 연구 기간의 한계 때문에 논의를 더 이어가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르에 대한 연구와 비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지금, 다각적으로 장르 콘텐츠를 비평하고 장르와 지금의 우리 사회를 연결해서 탐구해 보는 시도 자체는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이지만, ‘본격’보다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도이다. 이 책이 텍스트릿의 첫 번째 결과물이고, 대표 저자인 이융희 팀장이 다음 책에서는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더 깊이 있는 논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참고: 김지혜, 「장르문학·서브컬처에 담긴 독자적 미학」, 『경향신문』, 2019.08.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302042005&code=9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