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현대물보다는 사극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무서운 얘기를 해 달라는 학생들에게 <관동별곡>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사 방식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너희 반이 진도 꼴찌다'라는 선생님들의 단골 레퍼토리에 누구나 <관동별곡>을 공부할 때 느꼈을 심정("폭포가 멋지군, 하면 될 걸 갖다가 용의 꼬리가 어떻고, 오바는 또 얼마나 심한지. 그래서 500년 뒤에 니들은 읽기 싫다고 난리를 치고")을 솔직하게 내뱉으니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부산행: Train to Busan>을 패러디한 제목의 재기발랄함까지. 잔혹하지만 제목만큼이나 유쾌한 분위기를 끝까지 이끌어가 즐겁게 읽었다.
시골에서 유배 생활을 해다 갑자기 왕의 부름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됐는데, 왜 정철은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몇 마디로 압축하고 폭포 얘기나 줄줄이 늘어놓고 있을까? <관동행>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 단편이다. <관동별곡>의 저자 송강 정철을 모델로 한 우리의 주인공 정 대감은 학식이 풍부하고 유능한 관료였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한테나 쓴소리를 필터 없이 퍼붓는 고지식한 성격. 어린 딸이 처음 만든 물김치를 자랑하는 친구에게 그 물김치가 어째서 못 만든 건지 정 대감이 한 페이지 가득 품평을 늘어놓는 장면에서는 빵 터졌다. 그렇게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대소 신료들은 물론 왕에게 미움을 산 정 대감은 파직되고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벼슬 잘리고 지방으로 내려와 백수가 된 상황을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라는 시 구절로 미화하며 정신승리하던 정 대감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왕이 정 대감을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했다는 것이다. 아내과 종복들에게 모처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 들뜬 마음에 성대하게 관찰사 부임 행차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미친놈이 정 대감에게 뛰어든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희뿌옇게 썩은 눈알에 구더기가 끓고 있는 좀비였다. 왕과 조정 신료들은 도성을 제외한 전국에 좀비로 변하는 전염병이 퍼지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강원도 관찰사에 정 대감을 임명한 것이다. 정 대감 일행의 관동행은 꽃길이 아니라 저승길이었다.
좀비가 근처에만 나타나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재채기가 나는 증상 때문에 좀비 감지기가 된 정 대감. 정 대감은 자신의 좀비 감지기 기능과 풍부한 지식을 활용해 백성들과 함께 좀비에 맞서 싸운다. 가족들과 종복들에게 생계를 맡기고 하염없이 때만 기다렸던 잉여인간 정 대감이 자기 재능을 활용해 진정한 리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이 나름 감동적이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비녀 하나 들고 좀비에게 달려드는 유씨 부인의 용기와 사랑에 뭉클해지기도 했고. 나름대로의 사연과 잘생긴 외모, 뛰어난 무예 능력을 갖춰 조력자로 활약할 줄 알았던 마을 청년이, 결국은 좀비 치료제만 들고 도망가 버리는 대목은 클리셰를 깨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관동별곡>의 구절들과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까지 삽입해 역사물로서의 무게감도 살짝 넣었다. 작가 후기에서는 "단점 몇 개는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하지만 독자인 내가 보기에는 장점이 많았던 사랑스러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