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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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포일러 포함

편집자를 꿈꾼 지 10년이 됐지만 정작 내가 편집자로 일한 시간은 6개월도 되지 않는다. 편집자가 될 기회는 두 번 있었지만, 꿈을 펼칠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들에서 잔인하게 내쳐졌다. 지금도 적지 않은 나이인데 두 달 뒤면 한 살 더 먹고, 세 번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출판사 편집자 모집 공고가 떠서 그 출판사 책들을 살펴보려고 도서관에 갔다. 책마다 낯익은 이름이 편집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 다녔던 출판사에서 내 사수였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다섯 번이나 떨어진 출판학교를 졸업했다. 하는 일마다 대표에게 야단을 맞거나 대표와 의견이 충돌해 3주 만에 잘린 나와 달리, 그녀는 똑 부러지는 일 처리로 대표의 신뢰와 사랑을 받다 1년 만에 더 큰 출판사로 이직했다. 책들이 발행된 날짜를 보니 이 출판사에서도 반 년 이상 일해 오고 있는 듯하다. 나보다 어린데도 착실히 출판 경력을 쌓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허탈해져 마냥 손놓고 있던 내게 위로가 되어 준 건 그날 도서관에서 빌린 책 중 한 권이었다. 『 GV 빌런 고태경』. 지원하려는 출판사의 책은 아니었고, '저마다 간직한 꿈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라기에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할 때마다 항상 대출 중이었는데 마침 이번에는 서가에 놓여 있었고, 현실을 또 한 번 자각한 지금,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는데도 이 책부터 먼저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은 영화감독 조혜나다. 단편영화 두 편과 독립 장편영화 한 편, 단 세 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세 영화 모두 처참하게 실패하고 묻혔다. 학원 강사 일을 하며 영화와 멀어진 채로 살고 있던 그녀에게, 갑자기 그녀의 영화로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 영화의 주연이자 그녀의 전 연인이었던 배우가 떠오르는 스타가 된 덕분이었다. GV가 무난히 진행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한 50대 남자가 자신이 영화제 심사위원이라도 된 양, 조혜나에게 질문이라기보다는 날선 비평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냈다. 그는 모든 영화의 GV에서 난감한 질문들을 던져 감독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로 악명이 높은 'GV 빌런('GV'와 '악당'을 뜻하는 영어 단어 '빌런(villain)'의 합성어로, 무례한 질문을 던지면서 GV의 분위기를 흐리는 관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태경이었다. 분을 못 이겨 씩씩대던 조혜나는 그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했다. 다른 것도 아닌 영화로.

조혜나는 고태경에게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싶다고 제안한다. 처음 의도는 그가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조롱하려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조혜나는 점점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자신 못지않게, 어쩌면 자신보다 더 영화를 사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영화계의 거장 최강호 감독의 스태프였고, 한국 영화사 속 숨은 명작인 <초록 사과>의 조감독이었다. 그러나 질 낮은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에 감독이 될 기회를 놓쳤다. 일단 들어가면 자기 작품 하나는 찍을 수 있는 국립 영화학교에도 응시했지만, 세 번이나 떨어졌다. 그렇게 그는 영화계 현장에서 멀어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할 일 없이 잘난 척이나 하는 영화광이었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19년 동안 택시 기사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일주일에 두 번 노인센터에서 노인들에게 영화 강의를 해 왔다. 그는 택시 기사 일도, 영화 강의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영화 촬영은 체력이 필요한 일이기에 꾸준히 운동을 하며 체력을 유지하고 있고,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들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거의 모든 영화를 보고 GV에 참석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후배 스태프였던 영화사 대표에게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들고 간다. 이렇게 그는 현실과 꿈,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고 19년 동안 성실하게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왔다. 자신이 영화인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면서.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고작 반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편집자로 살아 온 나도 스스로를 편집자로 생각하고, 좋은 편집자가 되기 위해 성실하게 나를 다듬으며 살아간다면 편집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됐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시나리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조롱하는 영화사 대표 앞에서 모욕감을 참는 장면에서는 읽는 나도 괴로웠다. 출판사 면접을 보면서 왜 그 나이 먹도록 경력을 그것밖에 못 쌓았느냐, 회사에 오래 다니지 못했느냐,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았냐는 이야기들을 들어야 했던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의 시나리오나 내 도서 기획안이나 나름대로 고심을 하며 만들어냈지만, 현장에서 직접 뛸 수 없는 상태에서 만들었다 보니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라고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까지가 한계인가 싶어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고태경은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열등감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그것이 내가 느낀 고태경의 가장 존경스러운 점이다. 자신의 자식뻘인 조혜나가 자신은 세 번이나 떨어진 국립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을 받아 왔지만 그는 조혜나에게 열등감을 가지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 대해 의견이 엇갈려 조혜나와 싸울 때에도, 그는 영화사 대표에게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숨기고 싶어 했지만 열등감을 드러내거나 조혜나의 아픈 곳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도전할 용기는 없는데 남 품평이나 하고 영화는 만들어 본 적도 없다고, 조혜나가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는데도. 오히려 조혜나를 무시하는 국립 영화학교 교수 앞에서 "조혜나 감독은 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조혜나는 그런 그를 지켜보며 인정하게 된다. 열심히 하는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이어지지 않든, 그것 또한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마침내 조혜나의 다큐멘터리 영화 <GV 빌런 고태경>은 완성되었고,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GV 빌런 고태경>의 GV에서 고태경은 인생 처음으로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서 관객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2000년에 머물러 있던 고태경의 필모그래피는 19년 만에 본인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업데이트되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감독한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것. 그 날을 맞기 위해 또 GV에서 질문을 던지는 고태경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조혜나와 고태경은 사랑하는 영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포기하는 것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임을 조혜나의 동기 승호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게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고,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기에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영화를 포기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영화를 더 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기 위해 영화를 보내준 것이다. 나는 조혜나와 고태경처럼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하지만 승호의 선택을 이해하고 응원한다. 그의 선택이 내가 미래에 내릴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고태경의 필모그래피가 출연작이 아닌 감독한 영화들로 채워지길, 그가 자신이 연출한 영화 GV에서 만만치 않은 빌런을 만나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기를 바란다. 조혜나의 필모그래피도 좋은 영화들로 가득차길 바란다. 영화감독이 되지 않더라도 승호가 영화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영화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길 바란다. 그리고 다섯 권에 멈춰 있는 내가 만든 책들의 목록이 더 길어지길 바란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계속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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