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민주주의 -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프리즘 총서 26
진태원 지음 / 그린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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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 중 대다수가 스스로를 ‘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세입자로서 집주인에게 을이고, 직원으로서 고용주에게 을이며, 하청업체 직원으로서 원청업체에게 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인 ‘을’과 대한민국의 주인. 이 둘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나 크다. 우리 자신에게 당장 피부로 와 닿는 것은 우리가 대한민국의 주인이라는 것보다는 을이라는 것이다. 눈앞의 ‘갑질’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우리 을들이 대한민국의 주인,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철학자 진태원의『을의 민주주의』는 이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이 질문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주체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헌법에서는 국민이 주권자,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명시하지만,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개념은 그 안에 갑의 위치에 있는 1퍼센트의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99퍼센트의 국민이 있다는 것을 감춘다. 게다가 난민처럼 국민이라는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이들로 배제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약자, 피해자, 주변으로 밀려난 자, 배제된 이들을 ‘(자기) 몫(이) 없는 이들’이라고 부른다.


  민주주의가 성립되는 과정,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누군가는 늘 배제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는 노예와 여성이, 프랑스 혁명에서는 가난한 농민들, 노동자들이 배제되었고, 여성은 20세기가 되어서야 참정권을 손에 넣었다. 프랑스 인권 선언에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했지만, 어떤 조건도 없이(남성이거나, 백인이거나, 세금을 일정 금액 이상 낼 수 있는 사람이거나 등등) 사람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자유와 평등,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은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려는 사람들, 서로의 평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공동체의 토대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집단행동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자기 몫이 없던 사람들이 자기 몫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권리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고민과 질문,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몫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 몫을 찾으며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에티엔 발리바르,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등 서양의 정치 사상가들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면서 명쾌한 해법을 찾아가기보다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위기, 모순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려 한다. ‘대화법을 통해 문제를 탐구하는 도중에 부딪치게 되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관점에서 새로이 탐구하는 출발점이 되는 문제’를 ‘아포리아 aporia’라고 하는데, 이 책은 해답 대신 아포리아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을들이 연대하기보다는 또 다른 을들, 을 아래의 병, 병 아래의 정을 거느린다고 말한다. 갑과 을 사이, 을과 병, 정 사이의 위계화된 관계를 어떻게 평등한 민주주의적 관계로 바꿀 수 있을까? 을이 새로운 갑, 새로운 지배자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이 ‘을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야 할 근본적인 과제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포리아이다.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은 우리에게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여정의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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