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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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연극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그러나 시대라는 더 큰 무대에서 우리 중 대부분은 단역으로 그칠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주인공이 되고, 그들의 삶만이 역사로 기록된다. 무대를 떠나면 그저 잊히고 마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 우리의 부모님들이 있다. 사회학자 노명우의 부모도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 독재 정권의 통치까지 수많은 동시대 사람들과 같은 사회적 운명을 공유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된 부모님의 인생 복원 작업은, 부모님과 동시대인들이 살아갔던 당대의 사회상을 복원하는 것으로 확장됐다.


​  노명우의 부모는 자신에 대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사회학자 아들에게도 자신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삶 중 기록이나 증언으로 남겨지지 않은 공백들을 메우기 위해, 더 나아가 같은 시대를 살아갔던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을 알기 위해 사회학자 아들은 부모님이 살아갔던 당대의 대중영화들을 살펴보았다. 비평가들에게는 통속적이고 저속한 영화로 보이겠지만, 대중영화야말로 당대의 보통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소망과 욕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영화와 함께 당시의 뉴스 영상과 신문 기사, 사진 자료, 문학 작품과 당시 사람들의 구술 기록 등 다양한 자료들을 동원하며, 사회학자 아들은 두 사람이 살아갔던 시대의 사회상을 촘촘히 복원해 간다.


​  사회학자 아들은 수업료를 내지 못해 고민하는 조선인 학생을 그린 1940년 영화 <수업료>를 통해서, 아버지가 다니고 있던 일제강점기의 국민학교 풍경을 짐작해 본다. 1944년 일본 나고야로 강제 징병되었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고야에 가고, 1930, 40년대 조선 청년들의 징병을 독려하는 일본 영화들을 보면서 징병이 일본 본토 국민들과 동등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홍보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읽는다.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 또래의 서울 주민이 남긴 구술과, 당시 서울 시민들의 참담한 상황을 그린 박완서의 소설을 통해 어린 소녀였던 어머니가 전쟁을 어떻게 견뎌냈을지를 그려본다. 무작정 상경했다 양공주나 다방 레지가 되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여주인공들이 나오는 1960, 70년대 영화들에서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군 기지촌 다방에서 신세 한탄을 하던 양공주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렇게 개인의 인생사와 더 큰 시대의 역사, 현실의 역사와 가상의 창작물들, 에세이와 사회학, 역사학을 넘나들면서 복원한 당대의 시대상이 독자들의 눈앞에 영화처럼 펼쳐진다.


​  저자는 부모뿐만 아니라 당대라는 무대에 단역으로 올랐다 사라진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인생 여정을 그저 자신의 기구한 팔자라고만 생각했지, 그 뒤에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겪고, 광복되자마자 전쟁을 겪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아래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그들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국가의 의지를 따라 살아갔다. 저자는 왜 반항도 하지 않고, 자기 의지도 없이 살아갔느냐고 그들을 비난하지 않고 국가의 강력한 연출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과는 다른 미래를 꿈꾼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시대라는 무대에서 단역으로 섰다 사라진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헌사다.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우리는 우리의 무대에 서서 그들과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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