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컬렉션
매트 졸러 세이츠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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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포일러 포함


영화 속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모습. 미니어처 호텔에 숲이 우거진 배경을 합성해 완성했다.


가상의 유럽 국가 주브로브카 산악지대에 있는 최고급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곳의 지배인인 구스타브(랠프 파인즈)와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호텔과 감옥, 수도원을 넘나들며 펼치는 모험. 한 순간 한 순간 캡처하면 그대로 예술 작품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들. 이런 점들에 홀려 요즘 재개봉하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예전에 도서관에서 보아 두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아트북이 생각났다. 일부러 영화를 본 다음에 읽었는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본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었다.


제로(토니 레볼로리)와 아가사(시얼샤 로넌)이 빵 상자가 가득 쌓인 트럭 안에서 마주 보고 있는 장면. 화면 윗부분에 여백이 많이 남기 때문에 빵 상자들을 가득 쌓아 구도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미 있는 빵집 상자들을 참고하면서 8천여 개의 샘플을 만들어낸 끝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멘들 빵집의 빵 상자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화면 구도와 세트, 소품, 촬영 기법까지 정교하게 맞물리며 한 장면 한 장면이 완성되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열두 겹으로 된 결혼 케이크다. 신나게 먹으면서 그 안에 어떤 노력이 들어갔는지 생각할 필요 없이 오로지 맛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저자 매트 졸러 세이츠가 서문에서 한 말처럼, 이 아트북을 읽으면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케이크 같다고 느껴졌다. 감독 웨스 앤더슨, 주연 배우 랠프 파인즈, 의상 제작자, 음악 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와의 인터뷰와 영화의 의상, 음악, 프로덕션 디자인을 분석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완성된 영화인지 볼 수 있다. 제로와구스타브가 살고 있는 1932년의 주브로브카는 현실에 존재했던 세계가 아니라, 감독과 제작진이 여행과 옛 사진, 고전영화들에서 본 것들과 상상을 정교하게 짜 맞추어 만든 세계다.  미니어처, 세트, 연기, 의상, 음악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겹겹이 쌓여 완전히 현실적이지도,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정말 있을 것 같은, 있기를 바라게 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의 내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에 실린 막스 달튼의 일러스트


  이 아트북은 영화의 축소판 같다. 풍부한 사진 도판들과 텍스트, 일러스트가 정교하게 짜여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이룬다. 영화가 각 부분의 오프닝 장면의 서체와 디자인을 각각 다르게 했듯이, 책도 텍스트의 내용에 맞추어 다양한 디자인을 활용했다. 아트북 자체가 하나의 작품 같다. 그리고 사진들과 함께 화면 구도와 촬영 기법을 설명해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픽 아티스트 막스 달튼의 귀엽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는 중간중간에 한 페이지, 또는 몇 페이지, 또는 텍스트 옆의 한 구석을 차지하며 영화만큼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에 영감을 제공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위),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브(랠프 파인즈)(가운데), 노년의 제로에게서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듣는 젊은 작가(주드 로)(아래). 세 사람은 묘하게 서로 닮았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1881~1942 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이 영화를 츠바이크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나는 츠바이크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의 작가라는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와 츠바이크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이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가 츠바이크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정서는 
상실이다. 츠바이크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회화, 말러의 음악,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까지 혁신적인 예술과 학문이 꽃피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더 없이 아름다웠던 과거의 세계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고, 츠바이크는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가 그리워한 과거의 세계는 유럽의 고급 문화와 선한 인간성이 사라지기 직전의 시기, 영원히 사라진 순수였다.  

  제로와 구스타브는 온갖 고난을 이기고 부와 행복을 손에 넣지만,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 구스타브는 제로를 지키기 위해 군인들에게 반항했다 총살당했고, 제로가 사랑하는 아가사는 결혼한 지 몇 년도 안 되어 갓난 아들과 함께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화려하게 빛났던 호텔도 공산주의 정권이 집권하던 1980년대에 이미 쇠락해 버렸다. 노년의 제로는 잃어버린 것들, 1932년의 호텔과 구스타브, 아가사, 그 시절의 낭만과 순수를 그리워한다. 노년의 제로는 젊은 작가에게 구스타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작가는 제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액자식 구성도 츠바이크가 자주 쓰던 구성이다. 화자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이야기 속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과거는 더 멀게 느껴진다. 이런 효과까지도 츠바이크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 츠바이크와 제로가 그리워하는 유럽의 아름답고 순수했던 문화가 노동자들과 식민지 사람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면 찜찜하다. 그러나 소중히 여겼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다. 10페이지 분량이나 실린 츠바이크의 소설 속 구절들은 영화 속 상실의 정서를 어떤 텍스트보다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영화는 츠바이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정서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시각적인 요소와 텍스트 모두 훌륭한 책이지만, 영어 원서의 판면을 그대로 유지하다 보니 글씨가 작고 빽빽해진 것은 아쉽다. 한글은 알파벳과 달리 여러 자음과 모음이 조합되어 한 글자를 이루기 때문에 글자 형태가 더 복잡하고,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텍스트보다 더 많은 여백이 필요하다. 그리고 번역문은 원문보다 길이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구성이 정교하게 짜여 있어 페이지를 더 늘릴 수 없으니, 글씨 크기와 간격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뷰어가 감독과 배우, 제작진과 영화를 만드는 데 참고한 고전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영화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런 단점들이 있지만 이 책은 영화를 되새겨보고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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