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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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인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사망한 후에도 그가 실제로는 살아 있다는 음모론들이 제기되었다. 이 소설도 히틀러가 살아남았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 속 히틀러는 자기 뇌를 소년의 몸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이런 독특한 발상에 호기심이 생겼고, 한국 작가가 외국을 배경으로 외국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소설도 흔하지 않아서 더 관심이 갔다. 하지만 막상 읽고 보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의 독일부터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지 6년 후인 1969년의 미국까지 수십 년의 세월과 수천 킬로미터를 넘너들고 있다. 이야기의 규모는 크지만, 이야기를 설득력 있고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히틀러의 뇌 이식을 가능하게 한 과학 기술은 그저 여러 번의 시행 착오와 생체 실험을 거치면서 완성됐다, 정도로만 언급되고, 미국 정부를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미 연방준비은행의 회장 밀턴이나 미국 정부가 쓰는 전략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얄팍하다. 밀턴이 남긴 쪽지 한 장을 받고 미국의 주요 은행 은행장이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이 나오고, 미국을 뒤에서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 최고의원들의 모습에서는 유대인 비밀결사의 장로들이 세계 정복을 꿈꾼다는 음모론 '시온 의정서'가 떠오른다. 대만의 작가 찬호께이의 소설들을 보면서 추리 트릭이나 사회적 배경, 작품에서 사용되는 IT 기술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니 그런 디테일들이 소설을 더 실감 나고 설득력 있게 만든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이야기 자체는 술술 읽힐 만큼 재미있지만 신선하지 않다. 하지만 뇌 이식으로 히틀러가 살아남았다는 설정을 빼면 이제까지 나왔던 수많은 나치 소재 창작물들과 다를 것이 없다. 캐릭터들과 사건들도 어디에서 본 듯하다. 히틀러의 뇌와 젊은 청년의 잘생긴 외모, 뛰어난 신체 능력이 합쳐진 인물 휘슬러는 엄청난 악마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가 쓰는 수는 얄팍하다. 수십 명의 비서를 갈아치웠다는 밀턴은 처음에 베일에 싸인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괴팍하고 욕심 많은 노인 캐릭터들과 다를 것이 없다. 죽은 연인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우리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아 온 클리셰다. 그래서 나치를 소재로 한 다른 창작물들 중에서 이 소설을 추천할 만한 이유가 딱히 없다.


 많은 기대를 품고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케이블 방송에서 틀어주는 양산형 할리우드 스릴러를 한 편 본 느낌이다. 작가가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소재로 소설을 쓸 때면 디테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디테일에 신경을 써도 그 나라 자국민에게는 허점이 보인다. 그 나라 자국민이 아닌 독자라도 이 소설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 디테일이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디테일 없이 클리셰로만 채워져 있다. 산란기가 되면 우중충한 갈색에서 찬란한 보라색으로 색을 바꾼다는 귀신나방에 히틀러를 비유하고, 티즈데일의 시로 죽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고 해서 이 작품에 설득력과 깊이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시간 여유가 많을 때 재미 삼아 한 번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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