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숨은글에 스포일러 포함. 모바일 버전과 앱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스포일러 표시 전까지만 읽으시면 됩니다.


  2013년 홍콩, 한 대기업의 회장이 자택에서 작살총으로 살해당한다. 처음에는 강도의 소행인 줄 알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 뤄샤오밍駱小明 선배 경찰 관전둬振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사건 관계자들을 관전둬가 입원한 병실로 불러모은다. 그런데 관전둬는 암이 악화되어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다. 당황해하는 사건 관계자들에게 뤄샤오밍은 뇌파(뇌의 신경세포들이 활동할 때 발생하는 전파) 검사를 통해 관전둬의 답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뇌파검사기에 연결한 헤드셋을 관전둬의 머리에 씌우고 관전둬에게 질문했을 때 관전둬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검사기 화면의 커서가 Yes 쪽으로, 아니라고 생각하면 No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관전둬에게서 Yes나 No라는 대답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뤄샤오밍은 과연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대만의 작가 찬호께이陳浩基는『13.67』에서 여섯 개의 단편을 통해 관전둬라는 한 홍콩 경찰의 삶을 이야기한다. 2013년을 배경으로 하는 첫 번째 단편부터 1967년을 배경으로 하는 여섯 번째 단편까지 46년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자들은 2013년 66세의 노인이었던 관전둬의 모습부터 1967년 20세 청년이었던 관전둬의 모습까지 여섯 시기의 관전둬를 만날 수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고 그의 인생의 단편들이지만, 그 단편들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알 수 있다. 천재적인 두뇌와 따뜻한 인간미, 청렴결백한 성품을 갖춘 관전둬가 어떻게 한 사람의 경찰로 성장했고, 살아 왔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그와 함께 46년을 보낸 듯하다. 특히 마지막 단편 「빌려온 시간」을 다 읽고 나면 만감이 교차하며 첫 번째 단편「흑과 백의 시간」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번역자는 관전둬의 일생이 마치 홍콩이라는 도시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고 번역 후기에서 말했다. 그 말대로 관전둬의 일생을 통해 46년 동안의 홍콩의 역사 또한 함께 살펴볼 수 있다.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된 뒤 홍콩 내 정치 세력들의 대립은 점점 더 심해지고, 사회 운동과 시위도 더 격렬해진다. 홍콩 경찰은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대는 강경 진압하면서 정부를 옹호하는 시위대는 너그럽게 대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부정부패와 범죄조직과의 유착은 홍콩 경찰을 좀먹는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인들은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되면 자신들은 어떻게 될지 불안해한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인들이 경찰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고, 경찰들은 영국인 상관과 대화할 때도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영국에 저항하는 세력은 경찰이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영국과 중국,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공권력과 삼합회 같은 범죄조직들의 권력 사이에서 혼란을 겪어온 홍콩의 역사는 그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관전둬의 삶과 닮아 있다. 


 작가는 한 인물(관전둬), 한 도시(홍콩), 한 시대(1960년대에서 2010년대)를 묘사하는 이야기를 쓰면서 동시에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도 놓치지 않는다. 각 단편마다 잘 짜인 추리와 거듭되는 반전이 독자들의 허를 찌른다. 공학도 출신답게 추리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들도 매우 디테일해서, 페이지마다 담겨 있는 정보량이 엄청나다. 너무 디테일해서 많아진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 디테일하게 자료 조사를 하고 소설로 녹여내는 것도 보통 역량이 아니다. 


 홍콩의 근현대를 생생하게 담아낸 사회 비판 소설과 잘 짜인 추리를 갖춘 추리 소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작품이다. 홍콩의 번화함과 그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들까지 그려내고 있어, 홍콩 누아르 영화에 향수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영화들에서 느꼈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홍콩의 과거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독자들은 은 소설 속 한 사람의 삶을 통해 46년의 홍콩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 작가의 이름 찬호께이陳浩基는 표준중국어(북경어) 발음으로 천하오지다. 작가의 이름은 광동어로 표기되었는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중국인들의 이름은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한다는 외래어 표기 원칙에 따라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다. 간혹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광동어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보이는데,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표기된 것이다. 영어판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광동어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다. 관전둬의 광동어식 발음은 꽌짠똑, 뤄샤오밍의 광동어식 발음은 록시우멩(병어 표기로는 Ming이지만 실제 발음은 '멩'으로 들린다.)이다. 왜 작가 이름만 광동어 발음으로 표기했을까. 광동어 표기 쪽이 세계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아서일까? 


광동어 발음은 이 곳에서 찾았다.


광동어 발음 사전: http://m.yueyv.cn/


* 한국판 출판사에서 본문 앞에 홍콩 지도를 넣어준 덕분에 각 장의 사건 무대가 어디쯤에 있는지, 등장인물들이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원서에는 없던 지도인데, 출판사의 센스가 좋다고 생각한다. 


* 스포일러 부분











* 마지막 단편 「빌려온 시간」에 대한 단상 ▼

 책 전체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은 마지막 단편 「빌려온 시간」이다. 이 단편을 통해 사람의 운명이 얼마나 사소한 것 때문에 바뀔 수 있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당연히 이 단편의 화자 '나'가 관전둬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맬 때 명쾌한 추리로 설명해 주는 게 관전둬의 역할인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나'니까. 그러나 마지막 대사를 통해 '나'가 관전둬가 아닌 첫 단편 「흑과 백의 시간」의 범인 왕관탕이고, '나'와 함께 영국인 경무처장의 암살을 막은 경찰 '아칠(阿七, 본명이 아니라 경찰 번호 4447에서 딴 별명이다.)'이 관전둬라는 것이 드러난다.


 '나'는 아직 스무 살이 안 되었다고 했는데,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20세가 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으니 '나'가 관전둬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재적인 두뇌의 '나'를 '아칠'이 보조해 주고 있으니 당연히 '나'가 관전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성품을 보면 '나'가 관전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나'도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으려 하고, 상관들의 눈치를 보다 아이들이 테러로 죽는 것을 막지 못한 '아칠'을 비난할 정도의 정의감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자신과 형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그래서 경찰이 되게 해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형의 회사에 들어간다. 더 편하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반면 아칠은 상인들이 공짜로 음식을 대접해도 꼭 값을 지불할 정도로 청렴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직접 폭탄 해체 작업에 나선다. 청렴하면서도 정의를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는 성품은 관전둬다운 것이다. 


 '나', 즉 왕관탕이 경찰이 되어 관전둬와 함께 일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왕관탕은 친형처럼 따랐던 위안원빈과 함께 펑하이 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위안원빈이 불과 3년 뒤에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이 가졌어야 할 모든 것들을 빼앗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관전둬는 자신을 도와줬던 총명한 청년이 46년 뒤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왕관탕뿐만 아니라 관전둬의 운명까지 바꿔버린 것을 보니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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