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포함

  읽으면서 읽는다기보다는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것 같이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도 내게는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600여 페이지니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보다는 감당해낼 만한 분량이다.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가 무한반복되는 복잡한 가계도도, 의외로 그렇게 헷갈리지 않는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졌어도 할아버지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아버지는 호세 아르카디오, 아들은 아르카디오라고 부르는 식으로 조금씩 다르게 부르니까. 게다가 세월이 흐르고 세대 교체가 되면서 선대 호세 아르카디오나 아우렐리아노가 퇴장하니, 누가 누구인지 헷갈릴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나를 압도하는 것은 많은 분량이나 무한반복되는 같은 이름이 아니라, 작품 전체에 깔려 있는 고독의 무게였다. 

  작품 속 주인공들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에게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 전쟁 영웅도, 젊었을 때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도, 외국 문물을 흔쾌히 받아들여 현대화된 신세대들도 예외는 아니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고독을 지녔고, 우르술라처럼 어떤 고난도 강인하게 이겨내며 가문을 이끈 사람도 결국에는 노쇠해지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 그들 가족에게 가족애나 유대관계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각자가 지닌 고독을 뚫고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한 명씩 잊혀지고 사라진다. 


페르난도 보테로, <콜롬비아에서의 학살>, 2000.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묘사되는 콜롬비아의 잔혹한 근현대사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콜롬비아의 화가 보테로는 이 잔혹한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이들의 고독에는 이들의 조국 콜롬비아의 고독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 콜롬비아의 잔혹한 근현대사 속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도 깊어진다. 19세기 말부터 콜롬비아에서는 보수파와 자유파가 끊임없이 정쟁을 벌여왔고, 그로 인해 벌어진 내전에서 수십만 명이 죽어갔다. 이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사람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다. 그는 보수파가 투표를 조작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유파의 편에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념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전쟁을 하고, 원래도 고독하고 냉정했던 성품이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더 냉혹해진다. 대령의 조카손자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미국계 바나나 회사에 맞서 노동운동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시위에서 3천 명이 정부군에게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난 뒤, 그는 트라우마로 인해 남은 평생을 집안에 틀어박혀 살게 된다. 죽은 노동자들의 시체로 가득찬 열차에서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자신 혼자 살아있음을 깨닫고 전율하는 장면은 우리의 광주를 떠올리게 한다. 부엔디아 가문이 세운 유토피아였던 마콘도는 이렇게 내전과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과 착취를 겪으며 몰락해간다. 마콘도는 콜롬비아가 근현대사에서 겪었던 비극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무대이다. 

 마르케스는 환상과 현실을 자연스럽게 뒤섞으며 남미의 현실과 남미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전한다. 신부가 코코아를 마시고 공중부양을 하고, 미녀 레메디오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불에 싸인 채로 승천한다. 그 와중에도 레메디오스의 올케인 페르난다는 레메디오스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레메디오스가 걸치고 간 이불을 아까워한다. 비현실적인 사건들과 그 사건을 겪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심리가 자연스럽게 섞여, 어떤 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 이런 마술적 리얼리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에 가려졌던 것을 보여준다.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는 수천 명이 정부군의 총에 쓰러지고, 그 시체를 실은 기차에서 탈출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무도 시위에서 죽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는 공식적인 기록 앞에서 그가 겪은 현실은 환상, 비현실로 전락한다. 약자들의 현실을 환상이나 비현실로 만들어버리는 역사의 승자들 앞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 마술적 리얼리즘은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미처 마지막 줄을 다 읽어내기도 전에, 그는 자기가 결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거울의 도시, 아니 신기루의 도시가, 바람에 날려 없어질 터이며,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P. 460. (안정효 역)

 600여 페이지 내내 읽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았던 이 이야기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함께 사라진다. 자기가 지닌 고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어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고독과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면서 더 깊어진 고독,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낸 고독이 합쳐져, 누구도 그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마콘도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은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고독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 자신과 시대가 만들어낸 고독의 무게를 전한다.

P. S 1. 안정효 역인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조구호 역인 『백 년의 고독』 을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면서 읽었다.  두 가지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읽느라 더 진이 빠졌다. 아무래도 영어판을 토대로 중역한 안정효 역보다는 스페인어 원서를 직역한 조구호 역이 더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안정효 역은 인물들의 이름에서 오류가 보인다.(계속해서 메메를 레메로, 레나타를 레난타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다만 조구호 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이사벨라 여왕으로 오역했다. 스페인 이름 이사벨라와 영어 이름 엘리자베스 모두 성녀 엘리사벳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런 오역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조구호 역은 작품 속의 소소한 상징까지 역주로 해설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다만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느껴지는 건 안정효 역이어서, 조구호 역의 문장이 너무 복잡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안정효 역을 참고했다. 조구호 역은 한 문장이 몇 페이지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원문 문장의 느낌을 살리려 했고, 안정효 역은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읽히게 하려고 문장을 끊었기 때문일 것이다. 

P. S 2. 영상화하기 어려운 소설이지만, 영화보다는 좀 더 긴 호흡으로 원작을 담을 수 있는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드라마 제작자나 연출자라면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드라마화하는 데 도전해 보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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