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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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에 한창 빠져 있었을 때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다,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의 심리를 분석한 책을 발견했다. 우리 고전소설 속 인물로도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인터넷 서점을 뒤져봤더니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라는 책이 있었다. 목차를 보니 한 챕터에 우리 고전소설 한 편씩,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심리를 분석하는 책으로 보였다. 


  책을 읽어보니 제목의 '프로이트'가 주는 인상과 달리, 치밀한 심리학적 분석이라기보다는 고전 속 주인공들의 심리 상담 같았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고전소설을 좀 더 치밀하게 접목시켰으면 했던 독자들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고전소설 인물들의 상처에서 내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홍길동에게서는 피해의식에 짓눌려 사는 나를 발견했다.  홍길동은 서자로서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의적 활동을 하면서도 늘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는 율도국의 왕이라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묏자리를 자신이 정함으로써 이복형 대신 적장자 노릇을 한다. 치열하게 노력해 나라까지 세웠는데도 서자 컴플렉스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모습이,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하면서 생긴 피해의식과 어른이 된 이후 갑질을 당하면서 얻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닮아 보였다. 그가 피해의식을 자양분으로 삼아 남다른 성취를 얻은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지만, 자기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씻어내서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꽉 막혀 있던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심청에게서는 주변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보살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볼 수 없어 오히려 자녀가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을 '부모화'라고 한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는 이렇게 역전된 부모-자녀 관계에서 부모화된 자녀가 어떤 심리적 문제를 안게 되는지 설명한다. 부모화된 자녀들은 타인을 강박적으로 보살피고 그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만,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입장일 뿐 정작 자신을 보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조차 스스로 외면한다는 것이다. 심청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구걸을 하게 되면서부터 심청-심봉사 부녀의 부모 자녀 관계는 역전되었다. 심청은 아버지에 대한 강박적인 책임감 때문에,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인당수 제물이 되는 길을 택했다.  나는 부모화된 자녀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보살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오히려 인간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끊어지는 일을 겪으면서, 내 자신도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 


  심청이 인당수 제물이 됨으로써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독립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해석은, 내게 해결의 실마리를 주었다. 심청은 왕비가 되었고, 아버지를 찾을 때도 자신의 정체가 선녀가 아닌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걱정한다. 예전처럼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도 염려하고 돌보게 된 것이다. 심봉사는 뺑덕어미에게 속아 재산을 잃지만, 나라에서 여는 맹인잔치에 자기 힘으로 찾아가면서 스스로 설 수 있게 된다. 내 자신이 스스로 서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깨달았다. 


  이 둘뿐만 아니라,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나태하게 살다 몰락하는 이춘풍, 사랑에 집착하면서 괴물이 된 상사뱀, 일방적으로 힘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억눌려 망가진 사도세자까지 모든 인물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보았다.  내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뼈아프기도 했고, 나 자신과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에 희망을 가졌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들과 함께 상담실 소파에 함께 앉아 상담을 받으며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온 것처럼 후련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두 가지 버전의 우렁각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버전에서 원님에게 우렁각시를 빼앗긴 남편은 우렁각시를 그리워하고 원님을 원망하다 죽어버린다. 반면 두 번째 버전 속 남편은, 우렁각시가 왕에게 끌려가면서 '3년 동안 뜀뛰기를 연습해 두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그 말대로 뜀뛰기를 연습한다. 왕에게 끌려간 우렁각시가 3년 동안이나 웃지 않자, 왕은 우렁각시를 웃길 사람을 찾았다. 남편은 우렁각시를 웃기겠다며 입궐해 새털옷을 입고 뜀뛰기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우렁각시가 웃자 왕은 남편에게서 새털옷을 빼앗아 입고 춤을 춘다. 그러자 남편은 용포를 입고 진짜 왕을 내쫓은 뒤, 우렁각시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두 번째 버전 속 남편은 아내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말한 대로 열심히 뜀뛰기를 연습하면서 성장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될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 자신의 서사가 치유와 성장, 행복의 서사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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