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야나
C. 라자고파라차리 지음, 허정 옮김 / 한얼미디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스포일러 포함


라마야나는 어떤 작품인가


  최근 개봉한 인도 영화 <바라나시>에서는 바라나시에 온 순례자들이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의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라마'와 '시타'라는 이름이 들린다. <바라나시>뿐만 아니라 많은 인도 영화들에서 이 두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 이 두 사람은 인도의 고대 대서사시  『라마야나』 의 주인공이다.  『라마야나』 는   『마하바라타』 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대서사시로,  고대부터 내려오던 코살라 왕국의 왕자 라마의 이야기들을 기원전 3세기에 시인 발미키가 정리한 것이다. 발미키 이후로도 수천 년 동안 여러 문인들이  『라마야나』 를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정리하고 썼기 때문에   『라마야나』 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수많은 버전의 『라마야나』  중 가장 오래된 버전인 발미키의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라마야나』 가 올해 4월부터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그 버전은 아직 구하지 못해서, 20세기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인 차크라바르티 라자고파라차리가 소설로 재구성한 버전의  『라마야나』 를 읽었다. 고대 시인이 아닌 현대 작가가 시가 아닌 산문 형태로 다시 쓴 데다, 영문판(라자고파라차리가 쓴 원문은 타밀어(인도 타밀나두 지역에서 쓰이는 언어))을 중역한 것이니 고대의  『라마야나』 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발미키의   『라마야나』 가 가장 널리 인정받는  『라마야나』 의 표준이긴 해도 유일한 원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라자고파라차리의  『라마야나』 를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라자고파라차리가 현대인의 입장에서 A시인 버전에서는 이 장면이 이렇게 묘사된 반면, B시인의 버전에서는 저렇게 묘사되었다고 여러 버전의 『라마야나』를 비교 분석하고, 중간중간에 코멘트를 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힌두교의 정신을 담은 고전 라마야나


  라자고파라차리는 저자 서문에서 "카스트, 지역, 언어의 차이를 넘어 수많은 인도 국민들을 한 민족으로 결속시키는 것은  『라마야나』 와   『마하바라타』"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두 책이 인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더 나아가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할 수 있는 다르마(dharma, 종교의 가르침, 법, 정의, 도리)를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라마야나』 의 주인공 라마는 다르마를 지키며 힌두교에서 말하는 모든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의 인도인들도 라마를 닮으려 하고 그를 인생 모델로 삼는다고 한다. 

  라마는 힌두교에서도 가장 강력한 3대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의 화신이다. 비슈누 신은 
세상의 질서이자 정의인 다르마를 수호하고 인류를 보호하는 존재인데, 악마들의 왕 라바나가 인간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라바나는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서 어떤 신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신 대신 라바나를 죽일 인간이 필요했고, 비슈누 신은 다사라타 왕의 네 아들로 다시 태어난다. 그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이 맏아들 라마였다. 

  그는 문무에 모두 능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외모까지 잘생긴, 완벽한 왕재였다. 부왕이나 백성들이나 모두 라마가 왕위에 오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계모 카이케이 왕비의 음모로 라마는 아무 죄도 없이 추방되어 14년 동안 숲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거친 숲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내 시타, 동생 락슈마나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시타의 미모 이야기를 들은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한다.  라마는 동생 락슈마나, 원숭이 종족인 바나라 족과 힘을 합쳐 시타를 구하러 간다. 


  
저자 서문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여러분에게 더 큰 용기와 더 강한 의지, 더 순수한 정신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책에서는 라마의 용기와 의지, 정신력을 통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 그는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고, 크샤트리아(카스트 중 둘째 계급. 왕, 귀족 계급으로 전쟁에 임해 백성들을 보호한다.)로서 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카이케이 왕비 소생으로 자기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된 이복동생 바라타가 다시 왕위를 돌려준다고 해도,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다"며 유배생활을 스스로 계속하니, 사람이 아니라 보살로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완벽한 라마가 시타에 관한 일에는 이성을 잃는다. 여러 가지 고난들로 시타를 구하는 일이 자꾸 늦어지자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 또한 그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겪는 한계들도 있다. 라마가 인간으로서 겪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그에게 공감하고, 그를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 내가 닮아갈 수 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탄탄한 서사와 생생한 캐릭터들, 아름다운 묘사


  원래도 교훈적인 내용인데다 라자고파라차리가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러저러하다"는 코멘트를 자꾸 집어넣으니 도덕 교과서처럼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라마야나』 는 이야기의 재미와 문학적인 완성도도 놓치지 않고 있다. 특히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하고, 라마가 시타를 구하기 위해 준비하고 전쟁을 치르는 과정의 서사는 기승전결이 잘 짜여 있다. 라바나가 어떻게 라마와 락슈마나의 눈을 피해 시타를 납치했는지, 어떻게 라마가 납치된 시타의 행방을 알게 되었는지, 그러고 나서 어떻게 바나라 족과 동맹을 맺게 되었는지 인과관계들이 착착 맞물리며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라마와 라바나의 전쟁에서도 라마 쪽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니라, 라마가 위기를 겪기도 해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한다. 

 날아서 인도 본토에서 스리랑카 섬까지 바다를 건너가고, 부상당한 동료들을 위해 약초가 있는 산을 통째로 뽑아오는 등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것은 생생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다. 인간이라기보다 신처럼 보였던 라마도 아내의 실종에 이성을 잃어버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라마의 동생 락슈마나는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형 대신 화를 내면서, 형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요리사가 쓴 채소로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듯이, 훌륭한 시인은 악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의 기교를 발휘한다."는 라자고파라차리의 말처럼, 악역인 라바나도 매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악마 왕국을 번영하게 만들 정도로 유능한 군주이고 스스로 노력해 신도 꺾을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시타의 마음을 얻고 싶기 때문에 그녀를 강제로 취하지 않고 시타를 설득하려 한다.(물론 시타가 끝까지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해 놓고서, 시타가 자기를 좋아하길 바라는 건 어리석다.) 라자고파라차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나태한 기질을 지닌 독자들이 악한 자에게 연민을 느끼기 쉽다고 또 잔소리를 하지만, 잘 만든 캐릭터에 매력을 느낄 뿐인 독자들을 매도하지는 말자. 

  그리고 아름다운 묘사들은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다. 서사시가 아닌 산문 형태로 다시 쓰였고, 영문판을 한 번 더 거쳐 한국어로 옮겨졌으니 언어의 울림이나 운율 같은 것을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숲의 아름다운 풍경, 시타의 아름다운 모습, 라마와 시타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갖가지 비유들은 『라마야나』 에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보는 『라마야나』

  
  라마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여인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었다. 동맹군을 얻기 위해 적을 뒤에서 공격해 죽이는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시타의 정절을 의심해 죄없는 그녀가 온갖 고초를 겪게 했다. 라자고파라차리는 『라마야나』 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증오의 심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라마의 결점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라마의 미덕을 받아들이면 된다면서. 하지만 무조건적인 비난이 증오만 표출하는 것과 달리, 건설적인 비판은 우리를 더 나아가게 한다. 

  라자고파라차리가 『라마야나』 를 소설로 재구성하고  중간중간에 코멘트를 넣은 것도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의 일이다.(1957년) 그렇기 때문에 그의 관점도 지금의 우리와는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라자고파라차리는 모든 남자가 라마처럼 여성들의 구원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고 억압하는 남성보다는 훨씬 낫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남성이 여성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라마가 시타의 정절을 의심한 것은 후대에 힌두교에서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인 내용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 이 부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의 라마야나의 결말은 라마와 시타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해피엔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 힌두교인들은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시타에게 시련을 더 겪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안겼다. 라자고파라차리 버전 『라마야나』 에서는 시타가 한 번의 시련만 겪고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정절을 증명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많은 버전들에서 시타는 라마와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정절을 의심받아 숲으로 쫓겨나고, 결국에는 대지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애니메이션 <블루스를 부르는 시타>에서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현대 여성 니나가 남편에게 의심 받고 버림 받은 시타에게 공감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렇게 현대의 우리로서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는데도 가부장 제도의 질서 안에서 희생된 시타에게 연민을 가지고,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태도가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 보는 등, 새로운 시각으로 『라마야나』 를 볼 수 있다. 

 라자고파라차리가 말했듯이, 인도의 고전들은 모든 면에서 인도인들의 국민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라마야나』 는 인도 사람들의 종교관과 가치관을 그대로 담고 있고, 그 중 많은 것들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우리도 공감하고 본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인도인이 아니더라도 『라마야나』  자체의 재미와 문학적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인의 시각으로 『라마야나』 를 다시 읽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라마야나』 는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가지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낳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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