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포함

  상상해 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이들의 정권이 시작되면서 여성들은 모든 권리를 잃는다. 은행계좌가 막히고,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해고된다. 여성이 책을 읽으면 손목을 자르기 때문에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도 없다. 여성은 오직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낳을 수 없느냐는 기준으로 분류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은 자녀가 없는 고위층 가정에 배정되어, 그 집 남편과 성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낳는 '시녀'가 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은 핵폐기물 처리 등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에게 그나마 나은 선택지는, '시녀'들을 감시하는 통제 요원인 '아주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시녀 이야기』속 가상의 국가 '길리어드'의 모습이다. 이 소설 속의 20세기 말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을 장악하고 '길리어드'라는 정권을 세웠다.(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세운 정권의 이름답게 '길리어드(Gilead)'는 성경 속의 지명인 '길르앗'에서 따온 이름이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남편과 어린 딸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주인공 준은, 직장을 잃고 가족들과 강제로 헤어진 뒤 다리가 달린 자궁 그 자체인 시녀로 전락한다. 자신과 남편이 초혼이 아니라 재혼한 부부고,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변해 버린 세상 속에서도 일상은 흘러간다. 길리어드의 실체는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준의 독백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괴물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배란일마다 사령관과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낳지 못하면 폐기처분되는 삶. 그런 삶 속에서 준은 매일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자유와 가족을 되찾겠다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다. 준은 길리어드를 벗어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소설은 저항 세력인지 저항 세력을 가장한 정부의 감시자들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준을 데려가는 것으로 끝난다. 준이 살아가던 시대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2195년의 어느 역사 학회의 기록을 통해 그녀의 결말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준이 길리어드의 처참한 현실을 증언한 테이프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길리어드는 내부 분열과 온갖 사회 모순으로 인해 붕괴했다. 하지만 준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로 망명해 자유로워졌을지, 다시 길리어드 정권에 붙잡혔을지. 길리어드가 결국에는 무너졌다 해도, 준도, 또 다른 많은 여성들도 고통 받고 희생당했을 수 있다.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이곳이 길리어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길리어드는 소설 속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녀 이야기』같은 일은 여기선 벌어지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건 없어요. 어디서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적당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 자신도 이렇게 이야기했다.『시녀 이야기』 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들은 현실 속에도 숨어 있다. 자기가 입고 싶은 옷차림, 하고 싶은 머리 모양을 하고 활발하게 사회 생활을 하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부르카 속에, 집안에 갇히게 되었다. 여성들이 히잡을 제대로 썼는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옷차림을 하지 않았는지 감시하는 이란의 지도원들은 소설 속 '아주머니'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에게는 자유롭게 살아가다 종교 근본주의 정권의 등장으로 자유를 잃은 것이 현실이다. 

  길리어드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같은 먼 나라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숨어 있다. 2016년 말 한국 행정자치부는 전국의 가임기 여성 분포를 표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표했다. 올해 5월 24일에는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 소원의 공개 변론이 진행되었다. 법무부는 헌법재판소에 낸 의견서에서 여성이 성관계를 가지고서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다며, 남성도 함께 성관계를 가졌는데 낙태한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모순은 외면했다. 『시녀 이야기』가 30년도 더 전에 쓰여진 작품이고, 먼 가상의 나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말대로 길리어드는 어느 곳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길리어드 같은 세상이 오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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