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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포함
바로 몇 주 전에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몇 년 동안 바라 온 꿈이었고 드디어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사람의 손에 산산조각났다. 그 다음주에는 내가 쓴 글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먹었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글이 전혀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나쁜 일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그 때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볼 기회가 생겼고, 원작인 『파이 이야기』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 파이에게도 생각지 못한 나쁜 일들이 닥쳐왔다. 파이의 고향인 인도 타밀나두 지역은 1970년대에 총리인 인디라 간디의 독재를 가장 심하게 비판하는 곳이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 때문에 파이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운영했던 동물원을 팔고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고 어린 시절부터 추억을 쌓았던 동물원을 잃는 것은 파이에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이 닥쳐온다. 파이 가족을 싣고 캐나다로 떠나는 배가 갑작스러운 태풍을 맞고 침몰한다. 파이 혼자 살아남고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파이가 타고 있는 구명보트에는 200킬로그램이 넘는 거대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타고 있다. 모든 것을 잃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데다 사나운 호랑이가 목숨을 노린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파이를 구한 것은 이성과 신앙이었다. 파이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대로 이성을 동원해 생존할 방법을 찾는다. 당장 바다에서 조난당해도 이 책에 나오는 대로 따라하면 살아남을 것 같을 정도로, 파이의 생존기는 매우 자세하게 그려진다. 식량과 식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체크하고, 증류기를 이용해 바닷물을 민물로 만들며, 낚시나 작살로 생선을 잡아 바로 먹거나 리처드 파커에게 먹이로 주거나 말려서 비상 식량으로 저장한다. 파이의 생존기는 텍스트로 읽는 것만으로도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이런 디테일이 파이의 이성적이고 치밀한 면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성만으로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넓은 바다에서, 그것도 호랑이와 함께 표류된 상황에서 오래 살아남기는 어렵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파이는 오히려 신과 마주하고, 믿음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거대한 유조선을 만나서 구조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뻐했는데, 그 유조선은 파이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다. 희망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진 상황(지금의 내 상황과 비슷하다.)에서 파이는 절망하지만 곧 리처드 파커에게 말한다. 사랑한다고, 네가 있어 버틸 수 있다고, 포기하지 말자고. 파이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오히려 돌보고 사랑하면서 힘을 얻었다. 이성적으로 볼 때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 사랑하는 것, 사랑에서 힘을 얻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자 힘이 아닐까. 그래서 작가는 파이가 어린 시절 힌두교, 천주교, 이슬람교까지 세 개의 종교를 믿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과정을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 같다.
읽는 사람마저 고통스럽게 하는 길고도 험난한 표류기가 끝나고 파이는 구조된다. 그러나 파이가 들려주는 또 다른 버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리처드 파커는 없었다. 구명보트에 함께 탄 사람들 사이에서 잔혹한 살육이 일어났고, 파이 혼자 살아남아 표류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진실은 두 번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파이 자신도,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온 첫 번째 이야기를 진실로 선택한다. 그리고 파이는 상처를 딛고 어른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가 겪은 일들을 '리처드 파커'가 나오는 버전의 이야기로 만들어 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현실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내 기회를 산산조각낸 사람이 지금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고, 또 다른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나쁜 일이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 파커'가 나오는 버전의 이야기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더 버틸 만하다. 태평양은 아니지만 삶은 그만큼 거칠다. 파이의 남은 삶도 마냥 행복하지는 않고 때로는 태평양만큼이나 거칠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파이도 때로는 이성에, 때로는 신앙에 기대며 묵묵히 파도를 헤쳐나간다. 언젠가 단단한 땅에 도착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