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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몫
파리누쉬 사니이 지음, 허지은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8월
평점 :
* 스포일러 포함
돌아보니 이란에 대한 책, 그것도 이란 독재 정권 시기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었었다. 이란 사람들은 1979년까지 팔레비 왕조의 부패와 독재에 시달리다 1979년 이후로는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의 독재에 시달렸다. 거기에 1980년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8년 동안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많은 이란인들이 희생되었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만화 『페르세폴리스』 부터 이란계 작가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 『마리나』, 『자카란다 나무의 아이들』 까지 읽으면서 이 시기 이란의 역사를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소설 『나의 몫』 도 그때의 이란을 다룬 소설이니, '또 그 얘기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앞에서 말한 작품들과 달리 주인공 개인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 묻는다.
주인공 마수메는 어린 시절부터 이슬람의 인습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첫사랑 청년과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들켜,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과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술에 찌들어 있고 유부녀와 간통하는 오빠는, 연애편지 한 번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여동생이 자기 명예를 더럽혔다고 화를 내고 여동생을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어머니조차 딸이 강제로 결혼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이런 전통이 부조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마수메의 단짝친구 파르바네와 오빠의 간통 상대인 이웃집 여자 파르빈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자로 낙인찍히고 손가락질당한다.
다행히 마수메의 남편 하미드는 고등교육을 받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마수메의 뜻을 존중해 준다.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지도 않고, 마수메가 대학 교육을 받는 것까지 지지해준다. 하지만 하미드는 백마 탄 왕자님처럼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이데올로기에 몰두하느라 다른 사람의 의견과 신념은 존중하지 않고,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옥고를 치른 뒤에야 떨어져 있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만, 그의 외골수 기질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마수메는 처음에 지적인 남편을 존경했지만, 공산주의자인 남편이 이슬람 정권의 손에 처형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자처하는 오빠들이 정권에 빌붙어 부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어느 이념에도 휩쓸리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녀는 어느 이념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가고, 자신과 아이들을 지킨다.
그러나 이렇게 파란만장한 여정 끝에 그녀의 몫은 없었다. 그녀는 연애편지 사건 때문에 헤어져야 했던 첫사랑 사이드와 수십 년만에 재회하고 그와 재혼할 결심을 하지만, 자식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남편이 죽고 첫째 아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풀려나고, 둘째 아들이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오는 고난을 함께 겪어왔던 자식들이었으니 배신감이 더 컸다. 자식들은 이제 50대밖에 되지 않은 마수메를 늙은이 취급하면서 자기 체면 때문에 마수메의 재혼을 반대한다. 그 나이가 되면 육체적인 삶보다는 정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재혼하는 것은 순교자인 아버지를 배신하는 거라고. 자기들 멋대로 하고 싶을 때는 전통을 구닥다리 취급하면서 자기들 체면이 깎일까봐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식들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심지어 같은 여자이기에 오빠들보다 엄마를 잘 이해할 거라 믿었던 막내딸까지 재혼하겠다는 엄마를 주책난 노인네처럼 취급할 때 더 절망스럽고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 '각자의 운명은 태어나는 날 이마에 새겨지는 것이다. 각자의 몫은 따로 정해져 있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힌대도 바뀌지 않는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 이생에서 나에게 마련해 놓은 운명은 무엇일까? 나에게도 나만의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면 난 내 인생의 남자들, 나를 자신들이 신념과 목적의 제물로 삼은 남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운명의 일부인 걸까? 아버지와 오빠들, 남동생은 자신들이 명예를 위해, 남편은 자기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 나를 제물로 바쳤어. 그리고 아들들의 영웅적인 행동과 애국심에 다시 희생양이 되었지. 결국, 나는 누구일까? ...마치 나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은 것 같아. 나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어. 내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있나? 나를 위해 일을 한 적이 있어?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할 권리가 있은 적이 있었어? 누군가가 나에게 뭘 원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냐고?(p. 621.)
결국 모든 것에 지쳐 사이드와의 재혼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마수메는 친구 파르바네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독재와 종교의 억압 속에서도 자신과 가족들을 지켜온 그녀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어느 것 하나 자기 몫이라곤 남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쓸쓸해진다. 그녀처럼 지혜롭고 강인한 사람도 결국은 인습에 억압당하고 희생될 수밖에 없는 걸까. 이처럼 억압받는 이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이란에서 두 번이나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이란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이 모든 것을 바쳤지만 인습과 종교, 권력,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인간들 때문에 자기 몫을 잃은 여성들이 자기 몫을 찾는 데 작은 주춧돌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