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나폴리를 배경으로 두 친구의 60여 년에 걸친 우정과 애증을 담은 소설 네 편을 출간했다. 두 친구의 어린 시절을 그린  첫 번째 책  『나의 눈부신 친구』, 젊은 시절을 그린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중년 이후의 삶을 그린『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나폴리 4부작'으로 불린다. 이 네 권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권『나의 눈부신 친구』는 주인공 레누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유명 작가인 레누는 66세가 되던 2010년,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던 릴라가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릴라와의 평생에 걸친 우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야기는 50여 년 전 둘이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권은 둘이 친구가 된 이후부터 성장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네 권 중에서도 가장 분량이 적고,  둘이 짊어진 삶의 무게도 성인 시절에 비하면 가볍기에,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마을에서의 폭력, 가난이 둘을 괴롭히지만, 다음 권들에서 나올 삶의 무게와 막장 드라마에 비하면 약과다.  지식에 목마르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레누와, 어린 시절부터 당돌하고 거침없었던 릴라의 모습에서 이후 둘이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 짐작할 수 있다.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 레누와 릴라는 성년이 된다. 레누는 고향 나폴리를 떠나  피사의 노르말레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반면 릴라는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지만 고향 마을에서 복잡한 애정과 원한 관계에 얽히며 자기 나름대로의 전쟁에 임한다. 이야기는 둘의 이야기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 유럽을 휩쓸었던 청년 운동, 정치 개혁, 페미니즘 운동으로 확장된다. '새로운 이름'은 둘이 결혼을 하면서 얻은 새로운 이름(남편의 성)일 수도, 둘이 어른이 된 이후로 보고 듣고 겪는 새로운 것들일 수도 있다. 


  3권『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는 레누와 릴라의 삶이 더욱 더 복잡해진다. 둘은 여성으로서 커리어, 출산, 육아, 결혼생활, 애정관계에서 끝없는 난관에 부딪친다. 막장드라마와 다를 게 없는 복잡한 상황들에 독자까지 숨이 막힐 지경이다. 레누와 릴라는 항상 현명하지 않고 어리석은 결정들도 내린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각자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이제 이야기는 둘의 30대, 중년을 지나 레누가 릴라와의 우정을 회상하기 시작하던 2010년대로 돌아온다.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를 넘어 나폴리, 이 세상의 온갖 기쁨과 슬픔, 부조리함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됐던 이야기는 다시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나폴리 4부작'의 장점은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사는 내버려두고 한없이 내면으로 가라앉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소설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가 주인공의 절친과 동거하고 주인공의 시누이가 주인공의 구남친과 사귀며, 주인공은 불륜에 빠져 앞뒤 안 가리는 막장드라마가 펼쳐지지만, 막장드라마만큼이나 흡인력이 뛰어나다. '나폴리 4부작'은 60여 년에 이르는 긴 이야기인 만큼 네 권의 분량을 합치면 2400여 페이지에 이른다. 그럼에도 내가 4권 모두를 읽는 데 일주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재미있기만 하다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호평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장점은 여자들 사이의 우정을 섬세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많은 창작물들이 여자들의 우정이 깨지는 이유가 남자 문제인 것으로 묘사한다. 레누와 릴라 사이에 남자 문제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 문제는 레누와 릴라 사이의 기나긴 애증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레누는 평생 동안 릴라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릴라는 가난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며, 사람들을 자기가 뜻한 대로 이끄는 데 타고난 재능을 지녔다. 글재주 또한 전문 작가인 레누 못지 않다. 아니, 레누가 오히려 릴라의 타고난 글재주를 부러워할 정도이다. 레누는 릴라를 본보기로 자신을 늘 갈고 닦아 훌륭한 작가가 되지만, 늘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고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제3자인 독자의 입장에서는 릴라가 레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지 보이는데, 정작 레누는 열등감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4권 내내 둘이 서로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는 모습은 우리가 친구들과 겪었던 우정과 애증을 떠올리게 하며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 소설은 둘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당시의 시대상을 녹여낸다. 노골적으로 정치적 이념이나 역사적 사실을 독자들에게 주입하려는 소설보다, 등장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당시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소설이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을 더 와 닿게 한다.  그런 점에서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를 좋아하는데, '나폴리 4부작' 역시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이탈리아는 가부장제와 남성 과시적인 문화가 강한 나라이고, 레누와 릴라도 가부장제의 폭력에서 자유롭게 못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잘사는 북부 지방과 못하는 남부 지방의 대립이 심하며, 가난하고 낙후된 남부 지방을 대놓고 못마땅해하는 극우정당이 종종 득세하는 북부 지방과 달리, 남부 지역에서는 공산당과 좌파정당이 득세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주요 캐릭터들의 고향은 남부 지방인 나폴리이고,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며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다.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청년들의 반체제 운동인 68 운동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이탈리아 젊은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레누 역시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된다. 대학교에서 68 운동을 접한 레누와는 달리, 공장 노동자로서 힘겹게 살아가던 릴라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을 몸소 체험하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갖추게 된다. 둘의 삶을 통해 우리는 1950년대 이후부터의 나폴리, 더 나아가 유럽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소설에서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도, 여자들 사이의 우정을 더 섬세하게 그려주기를 기대하는 독자도,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기를 기대하는 독자들도 만족할 수 있는 소설이다. 2천 페이지가 넘는 긴 여정이 되겠지만, 여정을 마치고 나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여정은 아니겠지만, 두 친구와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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