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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상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평점 :
소설의 첫머리에 웬 부록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에도시대 일본의 다양한 직책과 직업들에 대한 설명이다. 다이묘는 그래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부교, 히키테, 사지 같은 직업과 직책 이름들은 처음 들어본다. 게다가 상, 하 권 합치면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또 책에 적혀 있는 추천사에서는 하권의 감동을 맛보려면 상권을 '견뎌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외딴 집』은 이 모든 장벽을 넘어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미야베 미유키는『화차』,『솔로몬의 위증』 등 사회 현실을 반영한 추리물을 주로 쓰는 작가이다. 현대물뿐 아니라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들도 썼는데,『외딴 집』도 그 중 하나다. 현대물을 주로 쓰는 작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외딴 집』의 고증은 미친 듯이 디테일하다. 에도시대 어촌에서 옷감 염색하는 과정까지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런 디테일들이 쌓여 소설 속 이야기의 현실감을 만들어낸다.
『외딴 집』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지역 마루미 번은 당시 에도시대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다. 막부의 쇼군과 지방 정부의 영주, 그들의 가신들부터 문지기, 의원, 어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신분과 직분은 놀랄 만큼 촘촘하게 세분화되어 있다. 조선에서라면 평민 신분일 감옥 문지기도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평민들보다 지체 있는 신분이다. 어린아이들이 막부에서 유배 보낸 죄인의 거처 가까이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호위무사들에게 죽임당하고,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은폐되는 세상. 소설 속 누구도 이 세상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간다. 미야베 미유키는 그 한 명 한 명을 평면적인 캐릭터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가장 가증스러운 인물까지도.
그들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마루미 번까지 흘러들어온 고아 소녀 호와 여자의 몸으로 마루미 번의 견습 히키테(지방의 방범대원)가 된 우사이다. 호는 어린아이지만 호보다 몇 배는 나이 먹었더라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이다. 굼뜨고 머리 회전도 느려 바보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소설 속 누구보다 솔직하고 올곧게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본다.
우사는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의 주인공 주디를 떠올리게 한다. 둘 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핸디캡(우사는 여자라는 핸디캡, 주디는 작은 초식동물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경찰(히키테는 지금의 경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둘 다 그들을 무시하던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경찰이었음을 증명한다.(그리고 주디는 토끼 캐릭터라는 점에서, 우사는 이름이 우사기(일본어로 토끼라는 뜻)와 비슷한 발음이기 때문에 토끼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점에서 묘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작품 내 실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인물 가가님. 아내와 자식들, 부하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죄로 에도에서 마루미 번의 외딴 집으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그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독자들은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의해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보게 된다.
이해관계 속에 억울한 사람이 짓밟히고 희생되는 일은 소설 속에서도 지금도 계속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소설 속 에이신 스님의 말처럼 사람은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완전히 귀신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눈물겨운 이야기는 그래서 따뜻하게 느껴진다.
P. S. 번역자 후기나 편집자들의 후기, 추천사에서 이 책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진다. 그러나 상권 책날개의 편집자 추천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읽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