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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평점 :
* 숨은글에 결말 스포일러 포함. 모바일과 앱 버전에서는 숨은글이 적용되지 않으니 스포일러 표시 부분 아래는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안네의 일기'부터 '쉰들러 리스트', '이것이 인간인가'까지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다룬 작품들은 수없이 많다. 이 소설도 그 수많은 책들 중 한 권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얇은 책이 서가에서 영원히 차지할 자리를 찾아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고 작가 아서 케스틀러는 자신있게 이 소설을 추천한다. 소설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뒤에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소설 본문은 한국어 번역판 기준으로 13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책 크기가 작은 데다 글씨는 크고 여백은 넓으니, 글씨와 여백을 줄이면 100페이지보다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케스틀러는 이 짧은 소설을 왜 그렇게까지 극찬했을까. 소설이 남기는 여운이 소설의 실제 분량보다 몇 배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이 첫 문장으로 작가는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을 함축한다. '그'는 '나', 유대인 소년 한스 슈바르츠가 평생 잊지 못하는 친구 콘라딘 폰 호엔펠스이다. 한스는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를 꿈꾸고 콘라딘이 그런 친구라고 믿었다. 다른 동급생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는 신경 쓰지도 않고 콘라딘 하나만을 친구로 여겼고, 콘라딘에게도 한스는 유일한 친구였다. 둘이 함께 책을 읽고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거닐며 둘만의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은 더 없이 순수하고 서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콘라딘은 독일 귀족 가문 출신이고, 그의 부모님은 나치에 협조적이고 유대인을 혐오한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의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유혈낭자한 폭력은 나오지 않지만, 두 친구를 갈라놓는 시대적 상황 자체가 거대한 폭력임을 보여준다. 둘은 1년 동안이라는 짧은 시간 우정을 나누고 그보다 수십 배는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게 된다. 그러나 수십 년 뒤, 한스는 생각지도 못한 편지를 받게 된다.
이 책을 보는 독자들은 하나 같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 서평들을 너무 많이 보아서 심드렁해져 있던 나조차도 마지막 문장을 보았을 때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 뒤에 어떤 사족도 붙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한 문장의 무게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우정과 시대의 어두움이 교차하며 이어지던 이야기는 이 한 문장으로 강렬한 결말을 맞지만, 한스도 독자들도 그 뒤로 많은 감정들을 느낄 것이다.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간결하지만 실제 분량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 한 편의 시 같은 소설. 이 소설은 독자들이 마지막 한 문장의 무게감에서 오래도록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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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호엔펠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
바로 이 문장이 많은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마지막 문장이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아 왔던 한스는 콘라딘과 함께 다녔던 학교에서 2차 세계대전 때 전사했던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와 함께 동창들의 행적이 적힌 인명부가 왔다. 일부러 콘라딘의 이름이 있을 H 항목만 빼고 읽다 다시 용기를 내어 H 항목을 읽는다. 그 때 이 마지막 문장이 나타난다.
그 뒤로 한스의 반응이나 뒷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독자들은 다만 짐작할 뿐이다. 콘라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한스와 달리, 콘라딘은 유대인을 싫어하는 부모님 앞에서 한스를 모른 척 했었다. 한스가 자기 부모님 때문에 상처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그리고 한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조차 콘라딘은 자신이 나치를 지지한다고 이야기한다. 동급생들이 아무리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놀리고 따돌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한스도, 콘라딘의 마지막 편지에는 깊이 상처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콘라딘의 마지막 선택이 더욱 더 큰 반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콘라딘은 어떻게 히틀러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히틀러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처단하겠다고 결심하는 데 한스에 대한 우정이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을까? 한스가 콘라딘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그를 잊으려 노력하던 순간에도, 콘라딘이 한스를 위해 용기를 내고 한스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콘라딘은 이미 죽었지만 콘라딘의 우정은 수십 년을 뛰어넘어 한스에게 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둘의 재회(Reunion, 이 책의 원제이다.)는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