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포함

  이 소설은 북한 소설이다. 남한에서 살고 있는 탈북 주민이 아닌, 지금 북한에서 살고 있는 북한 국민이 쓴 소설이다. 작가는 탈북한 여동생이 보낸 사람에게 이 소설의 원고를 건넸고, 그 덕분에 남한에서 이 소설이 출간될 수 있었다. '반디'도 작가가 자신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쓴 필명이다. 작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책장을 대충 넘겨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 느낀 감정은 이질감이었다. 북한에서 쓰이는 낯선 단어와 속담들(독자들에게 낯선 북한말은 각주로 뜻이 설명되어 있지만, 각주로 설명되지 않은 단어들 중에서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북한의 사회 체계, 직급, 행사들. 그리고 가부장적인 남녀 관계, 일제 강점기나 1950,60년대에 쓰였던 것과 비슷한 말투와 문체는 한국 근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남한의 정서와 언어가 사회 변화, 외국과의 교류 등으로 빠르게 변화할 동안 북한은 1950,60년대의 정서와 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 중반까지도 이 이질감이 읽는 데 장벽이 되었다. 나중에는 이 소설 특유의 문체에 익숙해지고 북한 특유의 언어와 표현이 오히려 흥미롭다고 느껴졌는데도, 다른 책을 펼치자 익숙한 남한 표준어 문체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분단이 남긴 거리감과 이질감은 이토록 크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이질감을 넘어서 귀 기울여야 하는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북녘땅 50년을 말하는 기계로, 멍에 쓴 인간으로 살며...잉크에 뼈로 적은 나의 이 글 사막처럼 메마르고 초원처럼 거칠어도 병인처럼 초라하고 석기처럼 미숙해도 독자여! 삼가 읽어다오"라고 말한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북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작가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다. 

  작가가 그린 1990년대의 북한은 마르크스가 봤다면 한탄할 정도로 부조리한 사회이다. 아이가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만 보면 경기를 일으켜서 커튼을 쳤는데, 커튼에 대한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살고 있던 평양 시내에서 지방으로 강제 이주된다. 김일성이 행차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기차역에 며칠 동안이나 갇혀 꼼짝도 못했는데, 언론에서는 김일성이 행차하는 도중 자신의 차에 길 가던 노인을 태워준 미담만 보도한다. 그들이 숭상하는 마르크스가 이런 사회를 바랐겠는가. 그들이 욕하던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그저 부품으로 혹사당하다가 버려진다. 그들의 성과는 지도자 계급의 몫으로 넘겨지고, 지도자 계급의 과오는 그들의 몫이 된다. 사회주의는 계급을 타파하고 사람들을 평등하게 하려고 시작되었는데, 북한 사회는 사람들에게 온갖 이유로 적대 계급이라는 낙인을 찍고 차별한다. 그들은 혁명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들에게는 혁명을 말할 자격도 없다. 혁명은 사람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평등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이다.

  블랙코미디로 느껴질 정도로 부조리한 이 이야기들은 불행히도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들은 소문들과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 작품들의 배경은 1990년대인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1990년대가 아닌 2010년대의 현실을 그린 작품들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통일이 되기 전 우선 남북의 정서적, 문화적 거리감을 줄여나가야 할 텐데 서로의 문학 작품이 좋은 통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남북 관계는 더욱 더 긴장되어 있고, 북한이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어 남북이 문학적으로 교류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다. 하지만 이질감을 넘어 이 소설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남북간의 장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균열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완전히 무너질 날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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