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 - 르네쌍스 명화에 숨겨진 살인사건
베른트 뢰크 지음, 최용찬 옮김 / 창비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채찍질>, 1460-1465년경(추정), 우르비노 마르케 국립미술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 <채찍질>은 독특한 그림이다.  제목은 <채찍질(당하는 예수)>이지만 정작 그림의 주인공인 예수는 그림 뒤쪽에 작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의 세 사람이 더 눈에 띄게 크게 그려져 있다. 왼쪽 빌라도의 법정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의 채찍질 장면과 오른쪽의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하나의 장면인지 별개의 장면인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오른쪽의 세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 베른트 뢰크는 오른쪽 인물들 중에서도 가운데의 금발 청년이 이탈리아의 산악도시 우르비노의 공작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이고, 이 그림이 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단토니오는 젊은 나이에 권력 다툼으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오단토니오가 살해되자 그의 뒤를 이어 우르비노의 공작이 된 이복형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였다. 뢰크는 당대 최고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채찍질>을 통해 페데리코의 살인을 고발한다고 주장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1472-1474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이름만 들으면 생소한 인물이지만, 프란체스카가 그린 초상화 덕분에 얼굴은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우르비노의 군주 귀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서자이지만,  당대의 기록들을 검토한 결과 귀단토니오의 서녀가 낳은 외손자로 추정된다. 오랫동안 후사가 없어서 조급해진 귀단토니오는 서출인데다 외손자인 페데리코를 후계자로 삼았지만, 페데리코가 태어난 지 5년 뒤에 친아들, 그것도 적자인 오단토니오가 태어났다. 게다가 오단토니오의 외가는 이탈리아의 명문가인 콜론나 가문이었으니 페데리코는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1443년 귀단토니오가 세상을 떠나자 페데리코가 아닌 열여섯 살짜리 오단토니오가 다음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오단토니오는 자객들에게 살해당했고, 오단토니오가 살해당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페데리코가 우르비노를 장악하고 우르비노의 군주가 되었다. 살인사건의 공모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그 중 한 명은 페데리코 밑에서 승승장구하기까지 했다. 누가 범인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저자는 다양한 가설과 사료, 도상들을 검토하면서 <채찍질>에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나간다. 오른쪽의 세 인물 중 왼쪽 인물이 걸친 붉은색 외투와 노란색 장화는 서양 회화 속 유다의 도상에서 자주 보이는 복장이다. 그림 속 유다와 빌라도는 기독교의 전설을 모은 책 『황금전설』에서 이복형제를 시기해 죽이는 인물로 나온다. 페데리코가 그랬듯이. 그 밖에도 그림 속에는 죽은 오단토니오를 이상화하고 페데리코의 악행을 고발하는 상징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런 상징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살인자인 페데리코와 오단토니오의 죽음으로 인해 그에게 원한을 품은 라이벌들의 싸움뿐만 아니라, 화가 프란체스카가 그림에 반영한 세계관과 사상까지 살펴본다. 


  번역자는 역자 후기에서 이 책이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 역사소설 『장미의 이름』처럼 흥미진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추리 역사소설의 스릴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시작부터 범인을 미리 밝히고,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간다기보다는, 살인사건과 관련된 역사와 세계관을 설명해 간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들과 역사인데다, 저자가 찾아내는 세세하고도 방대한 단서들을 한 줄에 꿰어 정리하기 쉽지 않다. 창비 특유의 된소리를 살리는 외래어 표기법(ex) 오단토니오→오단또니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도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꼼꼼히 읽어보면 <채찍질>이라는 그림 하나에 담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다채로운 시대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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