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


 르네상스 미술사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은 우리에게 매주마다 그림 하나씩을 지정해 주시고, 그 그림을 자기 눈에 보이는 그대로 설명하라는 과제를 내 주셨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과제 주제로 나왔을 때, 나는 그림 속 여인은 초록색, 갈색 등 여러 가지 색 옷을 입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수님은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이 상복이라는 학자들의 해석대로 보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본 것을 칭찬해 주셨다. 교수님은 아무리 권위 있는 학자의 작품 해석이라도 그대로 믿지 말고, 스스로 작품을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또한 기존의 권위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번역된 제목이나 원제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이나 미술 작품을 보는 하나의 표준 방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들도 공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40여 년 전인 1972년 BBC TV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이 책은, 미술 작품을 신성시하고 예술은 어떤 다른 것과도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도전한다.

  버거는 1장에서부터 이전의 미술사학자들이 미술 작품에 대해 늘어놓았던 미사여구를 걷어내려고 한다. 그는 소득이 낮을수록 미술관을 교회 같은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게 된다는 통계 결과를 제시하면서,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비싼 가격 덕분이라고 말한다. 복제 기술의 발달로 어디서나 작품의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술 작품의 진품은 부자들의 것으로 인식되고,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고 지적한다. 미술 작품이 지닌 권위 덕분에 미술 작품 진품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은 자기 권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품 자체의 가치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진품에 남은 화가의 흔적이, 화가가 그 그림을 그렸던 순간과 우리가 그 그림을 보는 순간을 이어준다고 이야기한다. 미술 작품 진품은 그 작품이 그려졌던 당시의 역사적 순간을 간직해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 있다.


(위) 한스 폰 아헨(1552-1615), <바쿠스, 케레스, 큐피드> (아래) 현대의 향수 광고


  그는 또한 미술 작품들뿐 아니라 사진, 광고 등 현대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까지 시야를 넓힌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응시의 대상이 되는지 포착한다. 남성이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는 능력으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성 자신조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버거는 벌거벗은(naked) 몸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누드(nude)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전시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한스 폰 아헨의 작품 <바쿠스, 케레스, 큐피드>에서 케레스는 연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연인이 아닌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 관객은 자신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즉 그림의 소유주이다. 현대의 광고 이미지 속 여성도 이미지 밖의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와 같이 누드 이미지에서 관객은 보통 남자이고 응시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 속 인물은 보통 여자이다. 버거는 이런 불평등한 관계가 지금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형성한다고 말했는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그가 말한 모습 그대로다.


(위)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아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패러디한 배달 앱 광고


  버거는 또한 다른 회화 형식과 달리 그림 속 대상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해 내는 유화의 특성 덕분에 유화는 자신이 지닌 재산을 과시하는 형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지 속 대상의 물질적인 특성을 생생히 전달한다는 공통점으로 유화와 광고를 연결시킨다. 물론 광고는 종종 사람들에게 익숙한 명화 작품의 언어를 빌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신을 각인시킨다. 하지만 단순히 유화 작품의 언어를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이미지 속 물건들을 얻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광고는 유화와 연결된다. 유화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과시한다면, 광고는 광고 속 물건을 얻으면 더 나아질 미래의 상태를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화가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면, 광고 이미지는 언제나 미래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버거는 이전의 미술사 논의에서 배제되었던 젠더 문제, 경제적 문제 등을 함께 고려하며 다른 방식으로 미술 작품을 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서구 유화의 전통을 현대 소비 사회의 광고와 연결짓는 등, 미술 작품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이미지들을 포함한 시각 문화를 살펴본다. 미술사, 미학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 속 다양한 시각적 체험과 요소들을 살펴보는 시각 문화 연구가 시작된 지 이미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권위를 지닌 기존의 해석과 미술 작품이 지닌 권위에서 벗어나 새롭게 보는 방식의 단초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는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이다. 

* 이 책의 도판은 모두 흑백으로 되어 있다. 열화당 쪽에서는 컬러 도판으로 교체할 수 있었지만 이곳저곳에서 컬러 도판을 가져오다 보면 도판들의 톤이 통일되지 않고 들쭉날쭉해져서 흑백 도판으로 통일하는 쪽을 택했다고 답변했다. 인쇄 기술을 사용해 도판들의 톤을 서로 비슷하게 조절할 수도 있지만, 모두 흑백 도판을 쓰는 쪽이 더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도판들의 톤이 서로 맞도록 조절하면서 컬러 도판을 싣는 쪽을 더 좋아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독자들 각자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