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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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몇 년 전 방효유(孺, 1357-1402)라는 명나라의 선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방효유는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가 자기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아깝게 여긴 영락제가 그를 회유하려 해도 방효유는 듣지 않았다. 이에 영락제는 방효유의 가족과 친척, 친구와 제자들까지 800여 명을 그의 눈앞에서 한 명씩 처형하며 그의 뜻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800여 명 모두가 처형될 때까지도 끝까지 자기 뜻을 꺾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처형되었다. 덕분에 방효유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했다. 자기 신념을 지키겠다는 이유만으로 그 많은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권리가 과연 있을까? 그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래서 내가 방효유라면 역사에 변절자로 남더라도 사람들을 살리고 영락제에게 굴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에서 주인공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도 같은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17세기 초 천주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에 잠입했다 정부 관리들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배교를 하면 신자들을 살려줄 것이고, 배교를 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죽이겠다는 정부 관리의 협박을 받게 된다. 동료인 프란시스코 가르페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로드리고 신부는 신자들을 살리고 배교하는 길을 택한다. 

  어떻게 보면 변절자의 변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신념이나 신앙도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고의 충신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변절자가 되더라도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던 내 마음도, 배교자가 되어 파문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더라도 사람들을 살리려고 했던 로드리고 신부의 마음도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럽혀지더라도 그 덕분에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러워지겠다는 마음, 그 마음은 자신을 낮추고 희생해서 인간을 구원하려 했던 예수의 마음과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하는 순간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배교를 하고 일본식 이름까지 받은 뒤 일본인으로 살게 된 로드리고 신부와, 그가 오기 이전에 그와 같은 일을 겪고 같은 처지에 있던 페레이라 신부는 천주교를 믿는 주민들은 없는지, 다른 유럽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잠입하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일까지 맡게 된다. 그 모습이 네덜란드 선원의 눈에는 영낙없는 배교자, 경쟁 상대인 다른 유럽 국가들을 견제하는 이기적인 포르투갈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로드리고와 페레이라는 그 와중에도 발각된 천주교 신자들을 구명하려 애썼다.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고발하는 것도, 더 이상 그들로 인해 죽어가는 신자들이 없게 하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일본 정부에 영합하는 비루한 인생으로 보였겠지만, 신의 눈에는 그들의 진심이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에는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하지만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사제로서의 삶까지 내려놓은 로드리고와 페레이라 역시 순교자들 못지않게 신과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로드리고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고.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다고. 사랑을 위해서 신념을 꺾는 것 또한 많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일이고 큰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내가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도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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