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역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페르난도 보테로, <우는 여인>, 1949.


  내가 세사르 바예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페르난도 보테로에 대한 논문을 쓸 때의 일이었다. 보테로는 뚱뚱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 그림으로 유명하지만, 이 그림 <우는 여인>(1949)처럼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이 겪는 고난과 폭력, 슬픔을 다룬 그림들도 경력 내내 그려 왔다. 보테로가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혼란, 폭력, 빈곤에 지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 1892.-1938)의 시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보테로의 그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슬픔이 가득한 이 그림에 정서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시는 어떤 시일까 궁금해졌다. 논문을 쓰는 내내 궁금해했지만, 논문을 다 마친 뒤에야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를 읽을 여유가 생겼다. 


  표제작「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부터 희망을 이야기할 거라는 기대는 무참히 부서진다. 제목이 반어법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 시는 오직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오늘 이 고통을 세사르 바예호로 겪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첫 구절부터 "어쨌든지간에 오늘 나는 괴롭습니다. / 오늘은 그저 괴로울 뿐입니다."라는 마지막 구절까지 이 시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자신의 아픔이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원인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한 메스티소(라틴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혼혈 인종)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바예호는 평생 동안 인종차별과 가난, 사회주의적 정치 성향으로 인한 정치적 탄압에 시달렸다. 그 모든 것이 그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었겠지만, 그가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고 / 모두에게 갓 구운 빵 조각을 주고 싶다.

한 줄기 강렬한 빛이 / 십자가에 박힌 못을 빼내어 / 거룩한 두 손이

부자들의 포도밭에서 먹을 것을 꺼내오면 좋으련만.

...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 대신 다른 가난한 이가 이 커피를 마시련만.

나는 못된 도둑......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일용할 양식-알레한드로 감보아에게 바침」

 자신이 살아 있어 다른 사람이 먹고 마실 것을 먹고 마시는 것마저 죄책감을 가질 정도로, 바예호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겼다. 그는 이렇게 인간들이 고통스러워 함에도 침묵하는 신에게 "항상 안온했던 당신은 /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 대해 관심조차 없습니다. / 당신은 멀리 계십니다."(「영원한 주사위 」)라고 원망한다. 그는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담담하게 노래할 뿐이다. 시인은 "커버린 어금니에도 암울한 그림자에도 / 달콤한 사랑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께 "세상은 아무에게서도 뭘 빼앗을 수 없는 어린 나이였던 우리에게서 값을 받아냈다."고 털어놓는다. (「트릴세 23 」)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에게 이야기한다. "너희들은 죽었다./ 그 전에도 결코 살아본 적이 없었지./ ...항상 죽어 있었던 존재의 운명. 초록빛 시절은 있어본 적도 없는데 / 마른 잎이 되어버린 운명. / 고아 중의 고아."(「트릴세 75 」) 그럼에도 어둡고 쓸쓸하고 비관적인 그의 시에서는 온기가 느껴진다. 자신처럼 고통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연민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 세력에 저항하다 죽어가는 노동자를 영웅으로 기리고(「3 」) 파시스트 세력과 맞서 싸우는 병사에게 "신의 아들인 자네는 살아야 하네! 죽이고 편지하게!"(「7 」) 라고 응원을 보낸다.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에게 한 사람, 두 사람, 스무 명, 백 명, 천 명 더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다 마침내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그를 에워싸자 그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그린 시「12-대중 」에서는 시인이 사람들 사이의 유대가 갖는 힘을 믿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집의 시들이 위로와 희망이 되거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절망과 고통이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들 안에는 자신과 다른 이들의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와 강인함이 살아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고통스러운 자들에게 내미는 손처럼 느껴진다.

* 이 시에는 그가 사람들에 대한 연민뿐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성적인 욕망에 대해 노골적으로 노래하는 시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미지들을 나열한 것 같은 난해한 시들도 함께 실려 있다. 사회주의자로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으며, 문학적인 실험을 시도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면모들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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