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피카소의 전쟁 -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거장의 반전 메시지
레셀 마틴 지음, 이종인 옮김 / 무우수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국립 소피아 왕비 미술관, 마드리드.


저 오래된 비극을 묘사하는 흑백 캔버스 위에서 피카소는 인간의 암울한 운명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그 운명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한다우리는 그 운명에 맞서기 위해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 모아 영원의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한다마치 숭고한 작별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초현실주의 시인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는 <게르니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게르니카>가 그려진 지 8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로서는 시인이 느꼈던 절박함과 비통함을 느끼기 어렵다나치군이 스페인의 게르니카 마을을 공습했고피카소는 그에 분노해 게르니카를 그렸다이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는 이 그림에 대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이 책 게르니카피카소의 전쟁은 <게르니카한 작품에 집중하면서, <게르니카>가 그려지게 된 이야기와 <게르니카>라는 그림이 겪어온 이야기들을 풀어낸다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시인이 <게르니카>를 통해 느꼈던 비통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게르니카 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36년 2스페인 총선에서 인민전선은 승리를 거두고 공화 정부를 세웠다민주적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의 연합 세력인 인민전선은 스페인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하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은 스페인을 인민전선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프랑코는 스페인을 차지하기 위해 외세인 독일의 나치 세력과 협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나치 군은 프랑코의 반군을 도와 스페인의 여러 지역을 인민전선의 공화국 정부에게서 빼앗았고게르니카가 있는 바스크 지역도 반군에게 포위되었다바스크 사람들은 포위되었지만 반군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프랑코는 그런 바스크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게르니카에 공습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1937년 4월 26프랑코의 사주를 받은 나치 공군은 7천여 명이 사는 산골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폐허가 된 게르니카와 주민들의 시신


  평화로웠던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고사람들은 폭격이나 나치 공군이 난사하는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시신들이 폭발의 충격으로 지붕으로 날아가거나 벽에 달라붙었다대피소에 숨은 사람들은 숨죽여 이 모든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렸고살아남은 사람들은 실종된 가족을 찾아다니며 울부짖었다며칠 되지 않아 피카소가 머물고 있는 파리의 언론들도 이 참혹한 사건을 보도했다그럼에도 프랑코 측은 범인은 자신들이 아니라 인민전선의 공산주의자들이라며 뻔뻔스럽게 발뺌했다마침 얼마 뒤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박람회의 스페인관에 들어갈 벽화를 제작하려 했던 피카소는 그 벽화 속에 게르니카의 비극을 담기로 했다피카소는 인민전선의 공화국을 지지하고 있었고스페인을 파시스트 국가로 만들기 위해 자국 국민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는 프랑코를 증오했다.

 

 <게르니카>에는 잔혹한 나치 군의 모습비행기폭탄폭격을 당하는 집들 대신 황소와 말전구 등 알 수 없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나치와 프랑코의 만행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도참상을 사실적으로 전하지도 않았다며 <게르니카>를 이해하지 못했다지금도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이 작품이 게르니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피카소가 그리려 한 것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사람들이 겪은 폭력과 고통죽음 그 자체였다특히 투우장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인 황소와 말은 이 그림 속에서 투우장 안에 예정되어 있는 죽음처럼 스페인 내전 안에 예정된 끔찍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그리고 <게르니카>가 주는 시각적 충격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잔인함으로 인해 죽어가는 존재들의 절망과 고통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게르니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조차 그림을 볼 때 "자신이 푸줏간의 고기처럼 토막쳐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로 얻은 수익을 스페인 구호 모금에 내는 등 공화국을 돕기 위해 애썼지만결국 스페인은 1939년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부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공화국 정부에 팔았기 때문에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으로 <게르니카>를 돌려보내는 것을 거부했다프랑코의 독재는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194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내진 <게르니카>는 수십 년 동안 스페인에 돌아오지 못했다


당신은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합니까화가라면 눈만으로음악가라면 귀로시인이라면 마음의 모든 방의 운율로권투선수라면 근육으로만뭐 이런 것들을 가지고 벌어먹는 멍청이라고 생각합니까아닙니다그것은 아닙니다예술가라면 마땅히 정치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그가 속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정열적인 일기쁘고 즐거운 일을 늘 의식하면서 그런 일들의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형성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다른 사람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니 그게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져다 준 저 풍성한 생활로부터 초연히 이탈해 구름 위의 존재처럼 노닐 수 있단 말입니까아닙니다그림은 그런 게 아닙니다아파트의 거실을 장식하기 위한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그림은 투쟁의 수단입니다."

 1945년 인터뷰에서 했던 이 말과 같이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불의와 맞섰다피카소는 프랑코보다 2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프랑코가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랑코의 독재 정부는 건재했다그러나 프랑코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프랑코의 꼭두각시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프랑코의 뒤를 이어 철권 정치를 계속하려던 프랑코의 심복 블랑코 총리는 바스크 지하 단체 조직원에게 살해당했다드디어 프랑코의 독재 정치가 끝난 것이다그리고 6년 뒤, <게르니카>는 그려진 지 44년만에 처음으로 스페인에 돌아오게 되었다. <게르니카>는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했다하지만 독재 정권보다도 오래 살아 남아 독재 정권의 악행을 지금까지도 증언하고 있다. <게르니카>를 통해 피카소는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다이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피카소와 게르니카가 겪어 온 이야기들을 읽으며독자들은 게르니카라는 그림 하나에 얼마나 많은 슬픔과 피눈물이 담겨 있는지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될 것이다이 모든 일들을 지켜 본 사람들만큼 깊은 감정과 의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그것은 책 속의 한 스페인 사람의 말처럼 더 좋은 일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서 <게르니카>가 거대한 캔버스 위에 물감을 배열해 놓은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으니"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게르니카>를 통해 인간의 잔혹성을 기억하고 이런 일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는 불의는 언젠가 사라지고무력해 보이는 예술은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것도.


P. S. 이 책은 <게르니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 제작 과정, 전시 당시의 비평과 대중들의 반응들까지 꼼꼼하게 전달하지만, 아쉽게도 <게르니카> 외의 다른 도판이나 사진 자료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특히 <게르니카>를 위해 어떤 모습의 습작들을 그렸는지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 습작들의 도판 하나 없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이었다. 그래서 책에서는 설명되었지만 도판이 실리지 않은 <게르니카>의 습작들의 도판 몇 점을 여기에 함께 올린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1937년 5월 2일.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이 습작 또한 1937년 5월 2일에 그려졌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1937년 5월 8일


도판 출처:  Rachel Wischnitzer, "Picasso's "Guernica", A Matter of Metaphor", Artibus et Historiae, Vol. 6, No. 12 (1985), pp. 15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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