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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 스포일러 포함
나홍진 감독은 자신의 영화 '곡성'이 신에게 질문하는 영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선입니까, 악입니까. 진짜 존재는 합니까. 존재한다면 왜 방관합니까. 그 질문을 '곡성'을 통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이집트의 작가 나지브 마흐푸즈의 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 속 등장인물들도,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들도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작품 내 분량은 적지만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인물 자발라위는 신을 상징한다. 자발라위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아드함(아담을 상징)이 이복형 이드리스(사탄을 상징)의 음모로 아버지의 대저택(에덴 동산을 상징)에서 쫓겨난 이후,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후손들은 대저택 아래에 마을을 형성한다. 작품의 주요 배경인 이 마을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마을 사람들은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고단한 삶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발라위의 정의가 이 마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신 대신 자발라위의 이름을 부르지만, 자발라위는 아드함이 쫓겨난 이후로 수백 년 동안 대저택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발라위가 나오지 않는 대신, 수십 년, 또는 수백 년마다 구원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자발라위나 그가 보낸 하인을 만나 마을에 정의를 펼치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능력과 의지로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마을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다. 자발(모세를 상징)은 자신들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구역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했고, 리파(예수를 상징)는 너무나 순수한 나머지 현실감각이 부족했다. 카심(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상징)은 압제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개혁은 일시적인 것일 뿐, 이들이 죽고 세월이 흐르면 마을은 원래의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들의 한계를 보면서 묻게 된다. 자발라위, 즉 신은 왜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정의를 실현하라고 맡기고 자신은 방관하고 있을까?
마을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직접 나선 사람은 마법사 아라파였다. 마법사라지만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약과 폭약을 만드는 것이다. 의약과 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과학자답게 그는 의문에 대한 답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선다. 그는 대저택에 잠입하지만 자발라위의 하인에게 들키고, 당황한 나머지 그를 실수로 죽이고 만다. 하인의 죽음으로 충격이 컸는지 수백 년을 살아왔던 자발라위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
'자발라위를 죽인 자'라는 아라파의 비밀을 알고 있는 권력자는 그를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아라파의 폭약 비법을 독점한다. 아라파의 폭약을 이용해 권력자는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숙청하고, 마을은 피로 물든다. 마을 사람들의 원한을 사 아라파는 권력자의 보호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고, 마을을 구원하겠다는 원래의 포부도 잃은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자발라위의 하녀가 찾아와 뜻밖의 말을 한다. 자발라위는 아라파가 한 행동에 흡족해하면서 죽었다는 것이다.
형의 꼬드김으로 자기 유언장을 보려고 했던 아드함은 내쫓고 수십 년 동안 돌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 하인을 죽이기까지 한 아라파의 행동에는 흡족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자발라위는 마을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자신을 직접 찾아올 생각을 한 아라파의 의지 자체를 보고 흡족해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하녀 자체가 아라파의 환상일 수도 있다. '너는 자발라위를 죽이지 않았고, 나는 네 의도가 선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라파의 환상. 아라파뿐만 아니라 이 책의 다른 주인공들도 모두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발라위나 그의 하인을 만났고, 그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후자가 더 납득이 간다. 전자가 진실이라고 해도 묻고 싶어진다. 흡족해하기만 하고 돌아가시면 어쩌란 겁니까. 왜 지금까지 후손들에게만 정의를 실현하라고 맡겨놓고 있었는지, 방관하고 있었는지 한 마디 대답도 없이요.
자발라위의 죽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영영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신도 죄 없는 자신에게 갑자기 고난이 닥친 이유를 묻는 욥에게 "네가 신의 섭리를 어찌 알겠느냐"라고만 말할 뿐,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신마저 죽고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또 다른 구원자가 나타나길 기다릴 뿐이다. 그들이 구원하는 구원자가 나타나도 구원은 일시적인 것일 뿐,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리고 폭력과 억압은 계속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신이 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방관하는지에 대한 답은 내놓지 않는다. 다만 신의 방관 속에서도 신을 믿으며 살아온 사람들, 신이 죽고도 또 다른 구원자를 기다리며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을 보여줄 뿐이다. 신의 답을 알 수는 없더라도 신이나 또 다른 누군가의 구원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들은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우리는 신의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소설 속 마을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