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마지막 70일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페터르 크나프 지음, 유예진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가난뱅이, 우울증 환자, 알콜 중독자, 사회 부적응자, 인정받지 못했던 천재. 이 책은 지금까지도 반 고흐에게 붙는 수식어들을 부정하며 시작한다. 그는 미치광이도, 사회부적응자도 아니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그림 역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를에서 살던 시절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우체부 룰랭이 한 달 월급으로 135프랑을 받을 때 그는 동생 테오에게서 200프랑을 생활비로 받았다.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가장보다 더 많은 생활비를 혼자 사용하며 여유로운 환경에서 작업했던 것이다. 테오를 통해 그의 그림을 접한 몇몇 사람들은 이전의 미술과는 다른 그의 신선한 그림에 감탄했고, 『메르퀴르 드 프랑스』 지에는 그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는 비평이 실렸다. 또한 반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믿음이 생긴 뒤로는 오히려 그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이 많은 사람에게 진정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생전에 단 한 점의 작품이 아니라 모든 작품을 팔았다. 화상인 동생 테오에게. 

  동생에게서 생활비를 넉넉히 받아서 생활이 여유로웠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먹여살릴 처자식이 있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하든 넉넉하든 마음이 가벼울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동생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에서 죽을 때까지 그가 자신의 그림이 팔릴 수 있을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해했던 모습을 보았다. 또 동생에게 모든 작품을 판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작품을 인정 받고 판매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들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 고흐에 대한 편견들을 걷어내고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저자들의 취지에는 동의한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오로지 증명된 사실들만을 다룬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가족들,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그가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오베르에서 생애 마지막 70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촘촘하게 복원한다. 저자들은 이전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반 고흐의 네덜란드어로 쓴 편지까지 새롭게 소개한다. 날짜를 적지 않은 편지들을 내용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 편지를 쓴 날짜를 추정했다. 70일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도 모두 이 책에 도판으로 실었는데, 그림에 표현된 자연 풍경의 모습을 분석해 그 그림이 그려진 날짜를 추정하는 수고까지 해냈다. 



반 고흐가 오베르에서 그린 <별 하나가 빛나는 하얀 집(1890)>(위)과 생레미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1889)>. 저자들은 반 고흐가 알퐁스 도데, 월트 휘트먼, 빅토르 위고가 쓴 글들 중에서 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글을 읽으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밤 하늘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지게 표현됐다며 정작 빈센트와 테오 형제는 생레미의 <별이 빛나는 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저자들은 오베르의 별이 생레미의 별들보다 생기 있지만 동시에 정적이며 한층 더 평온하게 빛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 속에서는 오베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의욕적으로 작업을 시작해, 끊임없이 그림에 대해 고민하고 그림을 그렸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과로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중압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테오와 건강을 잃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더 이상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은 그가 가난하거나 미치광이이거나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여겨 자살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반 고흐가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불안해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의견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의견이다. 하지만 마지막 70일 동안의 그의 행동과 생각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꼼꼼하게 복원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다. 또한 마지막 70일 동안 그린 모든 작품의 도판을 싣고, 작품 하나 하나마다 사용된 기법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작품의 배경 지식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덕분에 그의 마지막 70일 동안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를 평생 경제적으로 지원해준 동생 테오 반 고흐(왼쪽)와 그의 아내 요안나 반 고흐, 조카 빈센트(오른쪽).


  이 책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동생 테오와 제수 요안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다는 점이다.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세 달 후인 1890년 10월, 테오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이성을 잃었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세 달 뒤인 1891년 1월 세상을 떠난다. 테오의 주치의가 남긴 의료 기록도 이 책에 함께 실었다. 감정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 진찰 기록이지만, 이성을 잃고 자신의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읽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1890년 11월 28일, 이등실에 입원.
1891년 1월 25일, 84번 환자 사망.
테오도러스 반 고흐.
원인: 유전, 만성질환, 과로, 슬픔.

  테오의 사망 일시와 사인을 적은 이 짧은 기록 중, 사인 중 하나가 '슬픔'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더 슬프게 한다. 


소녀였을 때 나는 완벽하게 행복한 1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양의 행복을 평생에 걸쳐 나누어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몫의 행복을 만끽한 이상 이제 책임만이 남아 있다.
  테오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아들 빈센트(큰아버지 빈센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과 단 둘이 남겨진 아내 요안나. 요안나는 테오와 함께 보냈던 날들이 완벽하게 행복한 날들이었고 이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면서, 평생 동안 반 고흐의 그림들을 지킨다. 요안나는 반 고흐의 그림들을 활발하게 사람들에게 선보였고, 반 고흐의 편지들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그리고 자비를 들여 반 고흐가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한 책을 출간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반 고흐의 그림을 만지는 것을 내버려 둘 정도로 그림에 무지했었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노력 덕분에 사람들은 반 고흐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반 고흐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그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우리는 빈센트와 테오, 그리고 남겨진 요안나의 더 생생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제까지 많이 알려진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 외에도 테오가 오베르의 시골 의사 가셰 박사에게 형을 부탁하는 편지, 아내 요안나에게 보낸 러브레터, 입원 당시 테오의 진료 기록, 요안나가 빈센트를 칭찬했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에게 보낸 편지까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기록들, 잘 알려지지 않은 오베르에서의 빈센트의 작품들까지 만날 수 있다. 반 고흐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서 이제 반 고흐에 대한 웬만한 사실들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알아갈 수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