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 - 개정판
민길호 지음 / 학고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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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다 모르는 아이에게 "얘, 너 그렇게 쉬엄쉬엄 달리면 오히려 살이 더 쪄."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했다. 날씬하지도 못하고, 그애에게 상관 말라고 대꾸도 못한 내 자신이 창피했다. 잘난 데가 하나도 없고 소심하기만 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 게다가 그때 학교에는 내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거의 없었다. 


기분 전환을 하러 자주 들르던 동네 서점에 갔다. 그 때 눈에 띈 책이 이 책이었다. 고흐 관련 다른 책들과 달리 반 고흐의 자서전 형식으로 쓴 책이었다. 물론 반 고흐 자신이 쓴 자서전이 아니라 한국인 작가가 반 고흐 자신이 서술하는 방식으로 쓴 평전이었다. 반 고흐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어서 책에 빠져들어서 읽었다. 그러면서 반 고흐도 나처럼 자신이 못나게 느껴져서 힘들고, 외로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반 고흐와는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먼 나라의 아이가 반 고흐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위로를 받았다. 그때부터 나는 반 고흐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반 고흐의 이야기가 듣고 싶고 그의 그림이 보고 싶을 때는 이 책을 펼쳤다. 반 고흐에 대한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서 이 책의 저자가 자기 상상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반 고흐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반 고흐의 삶을 촘촘히 재구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록들 사이의 비어 있는 부분은 "반 고흐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을 것이다"라는 가정으로 채워지지만, 저자가 반 고흐가 되어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헤아리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유리잔에 꽂힌 활짝 핀 아몬드꽃 가지, 1888. 


봄기운을 담뿍 머금고 활기차게 뻗은 가지에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맺은 아몬드꽃. 저를 보며 희망의 손짓을 하는 듯, 활짝 핀 꽃송이들은 저의 미래를 약속하는 천사의 미소 같습니다.

푸른색으로 그 꽃이 담긴 유리잔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뜻하는 노란색이 잔을 받치고 있습니다. 또 저의 영혼의 움직임은 한 줄의 빨간색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제 저는 자유인입니다. 철창에 갇힌 새가 아닙니다. 

맘껏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을 끝없이 날렵니다. 어떠한 고통이 오더라도 제가 가고 싶은 그곳을 향하여 두 날개가 다 찢어져 바람에 날리는 그때까지 쉬지 않고 날아갈 겁니다.

서명은 왼쪽 윗부분에 했습니다. 빨간색으로 빈센트(Vincent)라고 썼습니다. 제 영혼의 약속입니다.

 저자는 반 고흐의 작품을 묘사할 때 미술적 기법에 대한 설명이나 단순한 작품 감상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그림을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이 반 고흐가 되어 그림을 그려가는 거니까. 사실은 저자의 목소리지만 반 고흐가 직접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묘사는 이 부분이다. 단순한 작품 묘사가 아니라 반 고흐의 설렘과 희망을 느낄 수 있고, 그 설렘과 희망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서. 


머리가 크고 나서 더 이성적으로 이 책을 보게 되면서, 이 책의 근본적인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반 고흐 자신이 이야기하는 반 고흐'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반 고흐'인 것이다. 반 고흐 자신이 남긴 기록들과 그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충실히 반영했지만 결국은 작가 자신의 추측과 주관적인 의견으로 만들어낸 반 고흐의 모습이다. 지금 다시 보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부분들과 지나치게 반 고흐의 기독교 신앙을 강조한 부분들도 적지 않다. 거기에 거부감을 느끼고, 저자가 보여주는 반 고흐의 모습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 고흐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은 제3자인 저자가 반 고흐의 삶을 설명하는 형식보다 독자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그래서 어린 나도 반 고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기분이 되어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반 고흐의 모습이 실제 반 고흐의 모습과 완벽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반 고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과 달리 감정적인 거리를 어느 정도 두고 보니 허점도 군데군데 보이지만, 반 고흐를 사랑하게 만든 책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아직도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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