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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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나는 마드리드, 파리,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아테네를 발견했다. 이미 1947년에 나는 뉴욕을 발견한 바 있었다. 1956년에는 런던, 안트베르펜, 브뤼셀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시와 엽서 몇 편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흥미로운 발견을 이야기하고 있는 텍스트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이 유명한 도시들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숙연한 침묵으로 이끄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태어났고 살고 있는 대륙에 몇몇 유럽인들이 도착한 것을 우쭐대며 부르는 소위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쿠바의 작가 레타마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이렇게 비꼬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문명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대륙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 이 '발견'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의 언어였다. 이 말이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그들이 세운 문명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고 지워버렸다. 아메리카 대륙은 실제로는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인도로 둔갑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정복되고 교화되어야 할 야만인이 되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눈부신 발전의 시작이었지만 아메리카인들에게는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콜럼버스 이후 유럽을 세계 체제의 중심, 그 밖의 지역을 주변으로 규정하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맞서 이 책은 "정치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좀 더 공정한 역사"를  이야기하려 한다. 중심도 주변도 없는 역사, 중심에서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역사가 아닌 각 지역의 역사가 화음을 만들며 진행되는 역사를.

 유럽은 콜럼버스 이후 자신들만이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고 아시아는 경제적으로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던 것처럼 주장해 왔다. 그런 유럽의 주장과 달리, 아시아 또한 아메리카에서 유출된 은괴의 수혜자였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은의 유입으로 상업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고, 생산성도 인구도 증가했다. 중국 남부와 인도의 벵골은 세계 시장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다. 1750년 당시 세계 GNP의 80퍼센트를 생산한 곳은 아시아였다. 


아이티의 독립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투생 루베르튀르(2011)'의 한 장면. 말을 타고 있는 루베르튀르의 모습이다.


 또한 저자는 정치적으로도 유럽은 계몽 사상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외의 지역은 전제군주제나 봉건제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에 영향을 받은 흑인 지도자들은 수 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1804년 독립국 아이티를 건설했다. 하지만 백인이 아닌 인종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유럽인들은 아이티 혁명을 철저히 외면했다. 미국 남부의 백인 노예주들은 그들이 일으킨 혁명이 전파될까 두려워했고, 그들의 두려움은 아이티의 이미지를 좀비와 흑마술, 미신이 창궐하는 나라로 왜곡시켰다.


커피 원두를 고르고 있는 멕시코 농민들.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지이다.


  유럽이 아닌 각자의 지역에서 발전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지역의 발전 아래 희생된 사람들도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자기 손으로 자기 땅에서 나는 은을 캐서 아무 대가 없이 유럽 정복자들에게 바쳐야 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는 은 중심으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갑자기 고향에서 머나먼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그들 덕분에 유럽인들은 달콤한 설탕으로 만든 디저트와 초콜릿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세계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멕시코 농민들은 생산비용의 반에도 못 미치는 낮은 커피 수매 가격(물건을 사들이는 가격. 여기에서는 농민들에게서 커피 회사들이 커피 원두를 사들이는 가격.) 때문에 게릴라 세력이 되거나 그들을 지원하는 불만세력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다. 

  이 책은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의 역사뿐만 아니라, 15세기에서 21세기, 아메리카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까지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오가면서 좀 더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독자들은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와 수백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뿐만 아니라, 전에는 듣지 못했던 좀 더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듣게 된다. 13년 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 유럽 중심의 세계사 속에 묻혀 있던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역사, 정복자의 이야기 아래 묻혀 있던 정복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기억할 가치가 있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때 "지리적으로 공정한 세계사"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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