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정치 민음 생각 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남우 외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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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인 여러분, 저는 이 책을 통해 키케로가 저를 설득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로마의 정치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연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누구보다 능했던 사람입니다. 연설의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연설의 전범(典範)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연설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고 감동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연설문 일곱 개를 모았는데, 설득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연설 일곱 개 모두가 저를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모든 이야기에 설득되기엔 그와 저 사이의 2000여 년이라는 긴 세월과 그로 인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 동안 제목만 들어 보았던 「카틸리나 탄핵 연설」은 소문대로 명문장이었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에 힘이 흘러넘쳐 수천 년 뒤의 독자인 저까지 압도했습니다. 제가 당시의 원로원 의원이나 로마 시민이었다면 , 그의 연설을 글이 아닌 육성으로 직접 들었다면 설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미래인으로서 저는 그의 연설에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말하는 것만큼 카틸리나가 극악무도한 반역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카틸리나는 다만 키케로와 정치적 견해가 달랐고, 궁지에 몰려서 과격해졌던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틸리나가 죽은 뒤에도 로마 빈민들은 부채 전액 탕감이라는 과감한 그의 공약 때문이었는지 그를 역적으로 보지 않고 그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키케로조차 그가 악과 함께 미덕도 겸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게다가 키케로는 절차와 원칙, 법을 중시하는 자신의 신념도 어기고 무리하게 카틸리나를 처형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무레나 변호 연설」도 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무레나는 실제로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레나를 카틸리나를 막을 수 있는 대항마이자 자신의 정책을 이을 정치적 후계자로 보았기에, 키케로는 무레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돕게 됐습니다. 그는 무레나에 대한 탄핵에 "정도를 넘어서 경직된, 진리나 인간 본성이 감당하기에는 다소 완고하고 가혹한 원칙들이 덧붙여져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무레나를 탄핵한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갈리아 등 외부 세력의 침입에 노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비롯한 로마의 지배층들이 반란에 더 민감했다는 것, 그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켜야 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자신의 원칙까지 어겨가며 누군가를 탄핵하거나 변호하는 것이 정당성 있는 행동이라고 설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인정되는 절대적인 정의를 위해서 그가 한 연설들에는 설득되었습니다.  「로스키우스 변호 연설」은 아직 20대 후반이었던 그가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 약자를 위해 했던 연설이었습니다. 로스키우스의 아버지의 재산을 노린 친척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에게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하지만 친척들이 당시의 최고 권력자 술라의 측근 크리소고누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로스키우스를 변호하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변호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완전히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라는 말에서 어떤 사람도 법과 정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그의 정의감과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변호 덕분에 로스키우스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정작 그는 크리소고누스와 술라의 보복이 두려워 2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현실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약자를 위해 정의를 지키려는 그의 정신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습니다.

 또한 독재자 안토니우스를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에 빗댄 「필리포스 연설(안토니우스 탄핵 연설)」도 제게 남기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 사후 처음에는 독재관직 폐지를 약속했지만, 점차 원로원과 민회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안토니우스의 전횡에 맞서 이 연설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토니우스의 전횡을 막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안토니우스가 보낸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 준엄한 비판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저런 갈채를, 특히 선동가들로 인한 경우, 늘 경멸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요컨대 모두가 하나같이 갈채를 보내고, 앞서 인민의 동의를 얻곤 하던 자들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것은 단순한 갈채가 아니라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대중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중우정치를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모두가 하나같이 누군가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누군가를 쫓아내는 것은 하나의 심판이라고 인정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를 보면서 그의 말에 더욱 더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인 여러분, 그는  수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노예가 있는 것도, 재판을 위해 노예가 고문을 당하는 것도 당연시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공의 이익, 도덕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의 신념은 수천 년을 뛰어넘어 지금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저는 설득되었습니다.  그의 신념이 심판인 여러분들 또한 설득하기를 바라며 저는 그의 말로 제 변론을 마치려고 합니다.

"심판인 여러분, 이 나라에서 이런 잔인함을 몰아내십시오. 이 나라에서 이제 이런 잔인함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 매 순간 잔인한 행위를 보고 듣는다면, 본성상 아무리 온순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는 고통 가운데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로스키우스 변호 연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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