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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ㅣ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이 책의 표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년의 영조 어진이 아닌, 20대 초 연잉군 시절의 초상이다. 노년 시절의 어진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모습이다. 연잉군 시절의 초상처럼, 이 책은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이 이끌어갔던 18세기 조선의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세자, 탕평책, 개혁 군주 같은 몇 개의 단어로만 압축하기에는 영조와 정조, 그리고 그들의 시대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이 책은 정치사와 경제사, 문화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대를 복원해 간다.
영조와 정조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극 속 이미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1, 2년도 견뎌낼 수 없는 정신적 압박감을 수십 년 동안 견디면서 조선을 통치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부터 쉴새없이 변화하는 정국을 살펴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즉위한 뒤에도 수십 년 동안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붕당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정국을 이끌어간다. 정조 또한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정쟁들을 지켜보며 그 속에서 살아남고 즉위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옳다고(義) 믿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늘의 이치(天理)에도 부합하는 의리(義理)를 바로 세우기 위해 때로는 의리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는 공론 대결에 의한 합의를 중시했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모든 세력의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다. 이 책은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에서 벗어나 더욱 더 복합적이고 변화무쌍했던 당시의 정치사를 보여준다. 부록에 실린 선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 붕당의 세력 변화를 정리한 그래프는 복잡했던 조선의 붕당사를 머릿속에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책은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통해 정치력을 모으려고 한 것이 단지 절대군주로서의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6세기 들어 안으로 시장이 발달하고 밖으로는 조선 경제가 은 본위 세계 경제 체제에 편입되면서 조세 제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조세 제도의 해묵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조세 제도 개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정치력의 결집이 필요했다. 영조는 신료들뿐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도 자문을 구하는 순문(詢問)을 재위기간 동안 200번이 넘게 열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개혁안을 놓고 수많은 반대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조세 개혁을 실시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조는 "백성을 위해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한다. 영조는 백성을 단순한 통치 대상이 아닌 국정의 동반자로 보았던 군주였다. 정조는 북학과 서학의 최신 성과까지 두루 활용해 새로운 유형의 성 화성을 쌓았고, 그곳에 각종 도시 시설과 상업 시설을 마련했다. 정조는 화성에서 각종 개혁을 실험하며, 그곳에서 입증된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국가 개혁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그의 개혁을 향한 꿈은 좌절된다.
또한 이 책은 18세기는 두 왕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중인들도 백성들도 새로운 꿈을 꾸는 시대였다고 이야기한다. 북학파는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오랑캐로 여겨졌던 청의 문물도 받아들였다. 북학파 학자들은 청의 문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대부들에게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서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벼슬길을 열어달라는 통청 운동을 꾸준히 진행했고, 중인들은 자신의 전문 능력을 활용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양반 문화의 모방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자신들만의 문학 모임인 시사(詩社)를 결성해 자신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백성들도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정조가 재위 기간 동안 능행 때 접수한 상언은 3232건에 달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궁정의 공연 문화가 쇠퇴하자 광대들은 폐쇄적인 궁 안이 아닌 개방적인 장터로 나가게 되었다. 공연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광대들은 이 지역과 저 지역, 이 종목과 저 종목의 공연들을 섞으면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고, 제한 없이 욕망을 표출했다. 18세기는 이렇게 다양한 꿈과 욕망, 가능성이 뒤엉켜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시기 조선은 바로 앞 세기인 18세기가 화려하게 빛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쇠락한다. 세도 정치로 정치 세력간의 균형은 깨졌고, 정치, 경제 개혁들은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20세기의 더 큰 몰락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선의 마지막 절정이었던 18세기가 품고 있었던 '잃어버린 가능성'을 찾고 싶어하지만, 이 책은 잘라 말한다. 18세기는 18세기일 뿐이라고. 18세기는 결코 이후의 시대에 종속되지 않은 그들만의 시대였고, 그들의 삶, 그들의 꿈을 현대의 꿈으로 굴절시키는 일 없이 되살려내려 한다고. 그 말처럼 이 책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18세기 조선을 다양한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하지만 그들이 꾸었던 꿈과 열망, 가능성은 지금의 우리가 꾸는 꿈과 열망, 가능성과도 통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는 그들이 남긴 것들도 분명 있으니까.
역사 서술의 객관성에 있어서나, 책의 편집과 구성에 있어서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책의 크기상 자세히 보기 어려운 지도를 크게 확대해 별도의 첨부자료로 넣고, 다양한 도판과 도표를 활용해 직관적인 이해를 도운 세심함이 돋보인다. 도판의 화질도 선명해 세부까지 살펴보기 좋다. 18세기 당대의 한양과 파리를 비교해 보고 18세기 세계사 속 주요 사건과 주요 인물을 함께 살펴보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18세기 조선을 보려는 폭넓은 시각도 돋보인다. 한국사 중 한 시대를 복합적으로 바라보기에 더 없이 좋은 통사서이다. 이 책은 각 세기를 통합적으로 살펴보는 민음 한국사 시리즈 중 한 권이라는데, 같은 시리즈의 앞으로 나올 책들도 기대하게 만든다. 이 시리즈가 지금의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계획한 대로 고조선에서부터 20세기 현대까지의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