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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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제목의 '첫사랑'과 '낙원'이라는 단어, 살구빛 표지만 보면 풋풋한 첫사랑을 그린 소설 같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첫사랑'과 '낙원'은 지독한 반어법이다. 이 소설은 첫사랑뿐 아니라 앞으로 할 수 있었던 모든 사랑을 빼앗겨 버린 이야기이다. 낙원이 아니라 낙원을 빼앗긴 이야기다. 무엇보다 성폭력을 겪었던 작가의 마지막 기록이다. 작가는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을 출간한 뒤 2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로 작년(2017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때 작가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스물일곱 살이었다. 


 주인공 팡쓰치와 류이팅은 어린 시절부터 단짝친구였다. 섬세한 문학적 감수성과 총명한 머리, 뛰어난 글재주라는 공통점 덕분에 둘은 더 깊이 교감할 수 있었다. 두 아이가 열세 살이었을 때, 쉰 살인 문학 선생 리궈화가 작문 과외를 해 주겠다며 접근했다. 두 아이의 부모는 아무 의심 없이 리궈화에게 아이들을 맡겼다. 리궈화는 평범한 외모인 이팅에게는 작문 수업만 했다. 그러나 예쁜 외모를 지닌 쓰치는 5년 동안 리궈화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당했다. 쓰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나도 선생님을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가족에게도, 단짝친구인 이팅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의지했던 이웃사촌 이원 언니에게도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던 쓰치는 5년이나 지나서야 이팅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리궈화를 존경하며 따랐고, 리궈화가 쓰치만 편애하는 것을 질투했던 이팅은 쓰치가 리궈화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오해하고 "역겹다"는 말까지 한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쓰치는 결국 미쳐버려서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뒤늦게 쓰치의 일기장을 보고 진실을 알게 된 이팅. 그리고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어 쓰치를 돌아볼 여력도 없었던 이원 언니. 둘은 분노하지만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리궈화를 처벌할 수도 없다. 쓰치의 삶도 다른 사람들의 삶도 그저 조용히 흘러간다. 


 참혹한 이야기이지만 문장은 유려하고, 감수성은 섬세하다. 5년 동안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텨온 쓰치의 심리도, 어린 여자아이들에 대한 성적 욕망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하는 리궈화의 심리도 세밀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쓰치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리궈화의 욕망을 미화하지 않는다. 쓰치는 온갖 지식과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리궈화가 얼마나 얄팍하고 더러운 인간인지를 간파할 만큼 총명하다. 쓰치는 리궈화에게 짓밟히면서도 그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쓰치의 문학적 재능과 지식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대만 작가 장이쉬안이 서평에서 말했듯이. "쓰치에게는 폭력에 저항하는 문명이 있었지만 문명은 야만을 당해내지 못했다."(p. 351.) 고상한 척 하던 리궈화가 자신을 비난하는 이팅을 "곰보 얼굴의 미친 암캐년"이라고 부르면서 폭행하는 장면과, 자신을 고발한 또 다른 피해자 궈샤오치에게 무참하게 폭행당한 쓰치의 사진을 보내며 협박하는 장면은 문명의 탈을 뒤집어쓴 야만의 추악함을 보여준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원은 이팅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 이 세상에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척 살 수 있어. 하지만 넌 쓰치가 경험했던 모든 고통을 겪고, 스치가 그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쥐어짜낸 모든 노력을 따라할 수도 있어. ... 넌 쓰치의 생각, 감정, 느낌, 기억, 환상, 사랑, 미움, 공포, 방황, 불안, 따뜻한 정, 욕망을 모두 경험하고 기억해야 해. 쓰치의 고통을 단단히 끌어안으면 쓰치가 될 수 있어. 그런 다음에 쓰치를 대신해서 쓰치의 몫까지 사는 거야.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미덕이야. 이팅, 분노를 표출하는 책을 써.


이 책을 읽기 괴로울 때마다 책장을 덮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하는 영상을 봤다. 그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웃으며 노래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나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원의 표현처럼 '마카롱과 핸드드립 커피, 수입산 문구만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 또한 기억하고 분노하려고 한다. 

 슬프게도 이 소설은 이런 이원과 이팅의 다짐이 아닌, 가해자들과 이웃들이 나누는 무심한 대화로 끝난다. 쓰치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지극히 평범해서 더 잔인하다. 작가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집필에 매달려 이 소설을 완성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 그는 이 소설 속 '마오마오'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이원을 곁에서 지켜주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이혼한 이원과 맺어지는 남자 마오마오. 그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남자고, 사회학자 차이이원의 표현대로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이원이 쓰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마오마오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했듯이, 작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목숨을 끊었다. 쓰치가 말했듯이 세상에는 아물 수 없는 고통이 있다. 

 그래도 우리가 앞으로 이어갈 이야기의 결말이 절망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아물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의 곁을 지키고, 아물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더 이상 없도록 더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싶다. "산삼보다 고3"이라는 말을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인 농담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여고생과 연애하는 것도 좋지, 라고 농담을 섞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거나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인데. 이런 이야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계속 기억하고 분노하고 기록할 것이다. 누구보다 용기 있게 고통을 직시하고 기록했던 작가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을 쓰치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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