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아저씨께


오랜만에 편지를 쓰네요. 시골에서 농사는 잘 되고 있나요? 저는 제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제 막 읽은 책은 『현남 오빠에게』라는 페미니즘에 대한 소설이에요. 요즘 페미니즘에 대해 논란이 너무 많고 저는 아는 게 정말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 무서웠어요. 하지만 아저씨께는 뭐든 편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 책 얘기를 좀 해볼게요. 


  『현남 오빠에게』는 단편소설집인데, 그 중에서도 이 책이랑 제목이 같은 단편소설은 주인공이 전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주인공은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어땠는지 되돌아봐요. 처음에 주인공은 남자친구가 모든 걸 챙겨주는 게 편했어요. 하지만 남자친구는 주인공이 듣는 수업도, 만나는 친구들도, 진로까지도 간섭하고 자기가 결정하려고 들었어요. 주인공이 남자친구에게 싫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남자친구 탓만 할 수 있냐, 그런 남자를 10년이나 만난 게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주인공이 가스라이팅을 당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가스라이팅'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가스등'이라는 연극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 연극 내용은 이렇대요. 남편이 아내를 미친 사람으로 몰려고 일부러 가스등을 어둡게 해 놓고, 부인이 '이거 좀 어둡지 않아?'하면 계속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요. 이런 일이 계속되자 아내는 자기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되죠. 이렇게 상황을 조작해서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판단력을 잃게 만든 다음,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게 가스라이팅이래요. 소설에서 남자친구는 끊임없이 주인공이 자기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처음 만났을 때 오빠가 이랬다, 고 하면 아냐, 그러지 않았어. 네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자기 의견이 부인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취업, 결혼, 출산 같은 중요한 문제를 남자친구가 좌지우지하려고 들어도 자기 의견을 말하기 어려워진 거예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묶어버리게 되는 것도 무서운 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슬픈 건 10년이 아니라 평생 동안 자기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에 묶여 있는 사람도 많다는 거예요. 「당신의 평화」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평생동안 남편과 시어머니의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그러면서 예비 며느리가 집안 행사에 오자 집안일을 시키려고 하고, 예비 며느리가 자기를 시어머니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해요. 예비 며느리가 집을 장만해 왔는데도 예단을 준비 안 했으니 자기를 무시하는 거라고 하고, 유학을 갔다 왔으니 문란했을 거라고 해요. 어머니 본인이 여자인데도 여자를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계속하고 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던 가부장적인 생각과 행동에 희생돼 왔으면서도, 그게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생각이 굳어져 버린 거죠.


이 단편소설의 작가는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해요.

 

"여성주의가 남녀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사랑을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틀렸다. 나는 여성주의야말로 사랑을 향한 투쟁이며, 사랑을 죽이는 가부장제의 해독제라고 생각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굴종을 요구하고 오만 가지 방법으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방식으로는 어떤 인간도 해방될 수 없다. 다른 인간에게 굴종을 요구하는 인간마저도 말이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받아 마땅한 고통은 없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힘 당할 이유 같은 건 없다.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꾼다."

 

아저씨, 저도 어느 한 쪽이 자기 성별 때문에 일방적으로 굴종해야 하고, 자기 존엄성이나 목숨을 위협받고 자기 생각이 틀린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느 한 쪽이 계속 참고 견디면서 유지되는 평화는 가짜 평화라고 생각해요. 고등학생 때 저를 가르치셨던 전도사님이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겉으로 보기엔 싸움이 없더라도, 어느 한 쪽만 행복하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못하다면 갈등이 일어날 여지는 항상 있는 거라구요.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성별 때문에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거예요. 누군가의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고 돕고 사랑하는 거죠. 서로 혐오하는 게 아니라요.


  사실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거리를 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발문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이런 글들이 쌓이고 다져지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지겠죠. 모두가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기 목소리와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땅이요. 이 책이 그 땅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제 생각을 얘기할게요. 늘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 뵐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