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s2a.kr/


유영하는 선 FLOATING LINES

박인경, 차명희, 김미영, 엄유정

APRIL 8 - JULY 5, 2025


S2A는 오는 2024년 5월 8일부터 7월 5일까지, 《유영하는 선(線) Floating Lines》전시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서로 다른 세대의 네 명의 여성 화가, 박인경(1926), 차명희(1947), 김미영(1984), 엄유정(1985)의 ‘선’ 작업을 한 자리에 모아 조망합니다. 종이 위에 그려낸

섬세한 선부터, 유화 특유의 깊이 있는 질감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이들의 작업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삶의 형태와 순간들을 자유롭고 유연한 붓질로 담아냅니다. 세대를 초월한 네 명의 여성 화가들이 펼쳐낼 《유영하는 선》 전시에 많은 관심과 관람 부탁드립니다. 




삼성역에서 개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S2A에 다녀왔다.


의류패션기업이 모태인 글로벌세아그룹 산하 갤러리다. 휘문고부근에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윤형근을 묶어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거장>전을 했는데 한문해설이 아주 자세하고 기획도 선명하고 동선이동도 깔끔해서 좋았다. S2A는 넓고 직관적이 공간에 작가의 화풍을 대표하는 핵심작품만 엄선해서 적절하게 배치해 보고나서 무엇을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게 해준다. 확실히 브랜딩, 마케팅 기반의 기업이라 코어 메시지 전달력이 좋다.



이번 전시도 좋다. 출품하는 작가 모두 여성이지만 여성을 전면에 부각하지 않았다. 현명하다. 미술가로서 그들에게 주목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기획 자체에 여성 작가 4명마 포함했으니 그 이상으로 전면에 내세울 필요없다. 과유불급이다. '여성'미술가를 강조하게 되면 미술에서 '여성'만 찾기마련인데 이 전시는 여성이 중요한게 아니라 회화작품 속 '선'의 유동(flow)에 방점이 있다. 그러니 '여성'이라는 카피라이팅을 할 경우에는 불필요한 오독을 유발한다.


2024년에는 여성미술가를 주목하는 전시도 열리고 책도 많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시아여성미술가 전시 <접속하는 몸>이 있었고 2권 합해서 950쪽에 달하는, 현대미술포럼이 기획한 한국 근현대 미술을 만든 여성들: 그들도 있었다 2권 세트도 있다.



















린다 노클린의 위대한 저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에 따라 여성이 주목받지 못한 여러 환경적 제도적 요인에 주목하며 그들을 조명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반대로 미술가로서 본질이 잊혀지고 "여성"이 전면에 부각되어 과연 그들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말했는가에 천착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여성의 몸,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차별 등등. 여성이라는 점을 지우고 그냥 미술가로서만 보길 원하는 전시는 여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들어가자마자 4명의 작품을 한 눈에 담게 다이제스트로 배치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진입해 안을 완만한 호로 훑고 왼쪽으로 나오는 구조다. 동선이 아주 깔끔하고 좋다.




하이라이트쳤다

빨간색이 박인경

노란색이 엄유경

파란색이 차명희

보라색이 김미영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인경의 수묵화 → 차명희의 존재론적 유화 → 엄유경 → 김미영으로 배치되었는데

전시의 글은 박인경 → 차명희 → 김미영 → 엄유경 순으로, 김미영의 리드미컬한 선을 엄유경이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서술되어있다. 둘의 1984년, 1985년생으로 거의 같은 나이이며 작품상으로도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박인경, 숲8, ink on paper, 연도미상, 이응노 미술관 소장

(수묵의 붓질이 보인다)


디테일, 차명희, 순간, 캔버스에 아크릴과 숯, 2024

(숯조각이 보인다)


디테일, 엄유정, Balloon Vine, 캔버스에 구아슈와 아크릴, 2021

(구아슈 선이 보인다)



김미영, Snow Ball, oil on linen, 2023

(물감이 마르기 전 다시 색을 덧입힌 웻 온 웻 기법으로 인해 섞인 선의 궤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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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economy/science/2025/05/07/RIS6RHSGOBCRNODH4XLSKNEOJA/


연구예산 삭감에 미국과학자들이 대거 망명한다.


중국계는 중국으로 돌아가고, 백인은 언어와 문화가 비슷한 캐나다가 차선책, 그 다음 호주와 영국.

연구자의 해외 망명은 제국패권 이동의 신호다


첫 번째, 15세기 비잔틴 제국몰락 후 16세기 엘 그레코가 베네치아로 이주한 후 스페인에서 활동한다

비잔틴 아이콘화를 배웠던 엘 그레코가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영향을 받은 후 톨레도로 넘어가 스페인 카톨릭 신비주의에 일조한다

엘그레코가 대표적이고 그리스계 비잔틴 학자가 이탈리아에 이주해 르네상스 부흥과 매너리즘 발달에 도움을 준다


두 번째, 17세기 황금시대에 암스테르담으로 상인, 과학자, 출판업자가 대거 몰린다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라는 사회경제적 혁신으로 해상패권, 식민지경영, 금융중심지 역할을 한 네덜란드에 스페인 가톨릭 탄압을 피해 유대인, 신교도, 프랑스 위그노, 플랑드르 인쇄업자등이 이주했고

이러한 다양한 기술인력의 유입에 힘입어 정물화, 지도 등 예술과학혁명이 일어난다

스피노자는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당대의 반도체기술이라할 수 있는 광학렌즈제작자였다


세 번째, 19세기 하우스만의 상하수도 정비, 위생개선, 넓은도로와 공원조성으로 근대적 대도시 프랑스 파리가 탄생한 이후 문인과 예술가가 파리로 몰려 벨에포크와 모더니즘을 탄생시켰다. 이미 루이14세,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때도 예술철학의 중심지였던 파리가 더 살기 좋은 환경으로 바뀌면서 유럽문화수도로 확립된다. 스웨덴, 미국, 폴란드 화가는 인상파화풍을 배우고 고국으로 돌아가 나름의 미학적 전통을 탄생시킨다


네 번째, 2차 대전시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 망명한다

프린스턴의 아인슈타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오펜하이머, 시카고의 레오 스트라우스 등 전후 미국의 과학혁신과 리버럴아츠 중심 고등교육의 성장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다섯 번째, 트럼프 2차 집권 후 연구 예산 대폭삭감으로 인해 과학자들이 캐나다, 중국, 유럽으로 이주하고 있다

새로운 과학기술 패권이동의 조짐이 보이고 글로벌 연구 허브경쟁이 본격화된다.


과학자와 예술가의 이동은 패권의 변화의 조짐이다. 신호탄이다..


과학자, 예술가들의 이주는 단순히 개인적 선택일 뿐 아니라

지식권력과 인력자원의 이동, 제국의 흥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한다. 

트럼프 시기의 과학자 유출, 중국과 유럽의 인재 유치경쟁은 현대판 두뇌 전쟁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봄직하다. 그러나 나는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고 싶다.


우선, 예술가와 과학자 중 누가 더 빨리 움직이는가? 를 생각해보자. 흥미로운 질문이다.

답은 모른다이다. 알 수 없고 둘 다 가능하다.


예술가의 경우

1) 빠를 수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에서 보듯 슬럼화된 옛 공장지대 (성수동, 을지로, 영국 테이트, 중국 798예술지구 등)의 낮은 임대료에 상대적으로 가난하여 도구가 많이 없는 젊은 예술가들이 빠르게 이동한다. 배낭 하나 캐리어 하나 메고 유학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빠른 이동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2) 느릴 수 있다.

중견 예술가는 큰 작업공간이 필요하고 후원자를 따라 이동한다. 납품 스케쥴, 미팅 등이 밀려있어 상대적으로 느릴 수 있다.

심지어 이동의 방향 또한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아니라, 전혀 관계 없는 나라로 이주할 수도 있다. 티벳, 히말라야, 인도에 많은 서양인들이 하안거 동안거를 지내고 불교수련을 하고 있고, 김윤신처럼 아르헨티나에서 작업할 수도 있다.

또한 하나의 도시로 대거 이주가 아니라 여러 허브와 노드로의 개개인의 분산적 이동일 수도 있다.


과학자의 경우

1) 빠를 수 있다.

포르투갈의 디지털 노마드 비자와 대만의 디지털 유목민 비자는 IT기반의 디지털 노마드형 연구자의 이주를 촉진시킨다.

팬데믹 이후 비대면 줌미팅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고 클라우드 기반의 가상 연구소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면서

디지털 인프라만 활용할 수 있다면 개인의 물리적 이동은 쉬워졌기 때문이다.


2) 느릴 수 있다.

과학자는 펀딩뿐 아니라 연구 인프라와 장비의존도가 높다. 

따라서 양자컴퓨터나 입자가속기처럼 몇 조원이 들어간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라면 이동은 쉽지 않다.

부동산대출문제, 서버이전의 문제, 실험실/연구소/대학원생 방법론세팅의 문제도 결부되어있다.

아무리 중국의 천인계획, EU의 영입정책이 있어도 전자는 문화와 정치문제가 있고, 후자는 펀딩규모가 너무 적다.



아울러 이동하지 않는 선택지도 있다.

훌륭하고 뛰어난 인재가 반드시 더 좋은 조건의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교육, 기존 사회적 인맥, 혹은 정치적/윤리적 신념은 이동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더 좋은 곳의 정의도 연구자마다 다르다. 연봉이나 펀딩이 아니라 소속감, 자율성, 정치적 안정성, 문화적 친연성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2차대전 후 미국으로 이동문제에 대해 이어말하자면

나치 치하에서도 독일에 남아 있었던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있다.

이주한 이들의 성공신화에 가려진 정주한 이들의 지성사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망명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이들은 태업, 적응, 타협, 저항, 은폐전략을 사용해 살아남아 후속세대를 보존하고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을 확장해보자

과연 연구자의 이동이 패권의 이동인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전처럼 국가단위의 경쟁구도로 파악할 필요가 없다.

이제 글로벌 통신망이 완비되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편지나 전보로 소통할 필요가 없어졌다.

물자의 교환도 신속하다.

따라서 글로벌 연구 커뮤니티, 오픈소스 협업 등이 가능하고 이동한 지역에서 생필품 등 소비재 소모만 하고 실제로는 기존 연구망에 소속되어서 지식권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


왜냐? 한 비유럽 국가가 국가정책에 따라 인재를 많이 데려가도

이미 영어기반으로 견고하게 구축된 지식생태계에서는 서구 네트워크에 의존해야만하기 때문.

코딩과 과학, 경제용어는 국제적으로 영어로 세팅되어 있다. 학술용어도 영어로 호환되고 따라서 몸은 비영어권국가에 있어도 생각과 정신의 지향성은 영어권에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물리적 이동과 권력 이동은 관계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재의 물리적 이주가 제국의 패권이동이라는 직선적 인과관계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대안으로 이런 접근법이 필요하다.

인재 이동은 = 디지털 네트워크 + 데이터 권력 + 문화 언어 자본을 합한 요소로 파악해야한다.

이러한 복합적 교차점에서 권력이동을 바라보는 다층적 시야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 시야로 다시 문제를 분석하자면

단기적으로는 과학자의 물리적 이동이 눈에 잡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누가, 어떤 네트워크가, 무슨 기관이 지식공유의 플랫폼과 표준을 선점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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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반짝이 웅진 우리그림책 136
하수정 지음 / 웅진주니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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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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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김응현미술관에 다녀왔다


산이 아주 똿! 하니 거대하여 병풍 같기도 한 것이 마치 넷플 인트로마냥 두둥 하고 산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듯한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해있다. 여초는 처음初과 같다如라는 말이다. 여자 많다 아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80세까지 서법예술에 매진한 김응현의 얼과 작품을 기리는 미술관이다. 근처에는 만해마을, 만해박물관과 시집박물관 등이 있다. 오늘은 서예만 본다.



차량이 80킬로로 씽씽 내달리는 6차선에 46번 국도가 굽이굽이 뱀처럼 흘러가다 만나게 되는 용대초등학교와 만해마을 사이에 여초김응현미술관이 있다. 용대초 앞에는 깨끗한 산의 물이 졸졸 흐르는 구만동계곡이 있어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우르르 몰려나와 너도 나도 멱을 감으러 뛰어들지도 모르겠다.


-어이! 선생, 요즘 아~들이 무슨 쌍팔년도인줄 알아요? 집에서 샤워합니다 집에서요


-아, 아, 마이크테스트중, 네 잠깐 아무말 대잔치였습니다. 자 그럼 다음 사람!


서울버스와 다를 바 없는 인제군 시내버스는 시트에 새삥 가죽냄새가 난다. 전기차라 승차감이 좋다. 용대초등학교에 내려서 시골길을 만끽 하며 미술관까지 걸어간다. 음, 시골의 스멜.. 똥냄새와 재활용 페트병 썩는 냄새가 섞여난다. 코로나로 인한 관광객 급감으로 타격을 받았는지 야영장은 버려진채 방치되어있다. 


모를 때는 시골은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여 도시탈출을 꿈꾼다. 풀밭 위 조그마한 오두막 내 집 지어서 다닥다닥 도시 아파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삶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벌레도 많고 상하수도 노후화되고 수압도 낮고 전기수도가 끊길 수도 있으며 밤낮에 벌레에 가끔 산짐승이 출몰하고, 집과 마당을 끊임없이 관리해야하며 쓰레기 수거차가 매일 오지도 않는다. 할마씨들은 쓰레기를 소각해서 버려 산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차 없으면 생필품 구매가 어렵다. 마을 이장, 온갖 협회 청년회, 모임 등에 시달리기도 한다. 괜히 귀농했다가 얼마 못 버티고 돌아오는게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력과 삶의 의지는 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높은 생활력과 삶의 의지 없이는 자연과 맞서서 살아남을 수 없다. 옥수수와 감자와 황태만 먹으며 꾸준히 열량을 제공하는 단백질에 의지해 강원의 산악을 평생 오르락 내리락한 이들의 후손에게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난 연약한 도시인이 여생을 맡기고자 안일하게 생각해서 내려갔다가 데이는 셈.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 <늑대아이>에서 시골 농민들이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당신들의 근성이 대단한 것이오!


이런 생각에 침잠해 15분 정도 찻길을 걸어가니 미술관이 눈에 들어온다.


미술관은 2012년에 건축우수상을 받은 멋진 공간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을 내려다보는 노출콘크리트 2층 건물 앞에 검은 대리석으로 짜여진 수공간이 인상적이다. 내부는 비스듬하니 느슨하게 올라가는 계단에 1층 일부와 2층이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 배치가 비효율적이어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것 같지 않고 서예라는 주제를 공간에 온전히 살리고 있지는 않다는 다소 아쉬운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좋아, 먼 거리를 옴직하다고 평하겠다.



여초 김응현 서예관의 서예의 퀄리티는 대단하다. 깜짝 놀랐다.


위는 우측은 한자 좌측은 한글

아래는 독립선언서의 국한문 혼용



일단 한자와 한글 서예 둘 다 잘한다. 배움의 순서가 있다면 한자가 먼저이긴하다. 표음문자 기반인 한글은 기호의 갯수가 정해져있지만 표의문자인 한자는 글자갯수가 몇 천 몇 만자가 있다. 너무 많기에 먼저 익히는 게 효율적이다. 물론 획수의 패턴이 있고, 상형, 회의 등 나름의 글자형성방법이 있지만 그런 조립방법이 만능은 아니다. 


수학의 세계에서는 원리를 배우면 개별요소는 치환할 수 있으나 언어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다양한 예시에서 경험적으로 원리를 추론해낼 수는 있어도 원리를 적용해 새 요소를 만들 수는 없다.  A+(B+C)=(A+B)+C가 되지 않는다. 마음 심 부수를 배웠다고 모든 감정 어휘에 마음 심을 넣어 새로 만들 수 없고, 이미 존재하는 예시에서 마음 심이 보이면 마음과 관련된 말이겠거니 이해해볼 수만 있다는 말이다.


한자와 한글 서예를 둘 다 잘 하는 여초 김응현은 67년에 오탈자를 보완해서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서도 새로 새겼다. 이외에도 수많은 현판과 서예교육자료 등을 남겼다. 한국어와 영어를 둘 다 잘하는 아리랑 앵커 제니퍼 클라이드가 생각난다. 지하철 안내방송을 녹음한 인물이다. 덕분에 우리는 명동을 미영도옹으로 듣지 않아도 되고 반대로 고속버스터미널을 익스프뤠스 버스 털미널로 듣게 되었다. 한국어, 영어 발음 둘 다 네이티브에 준하는 한국계 미국인이 녹음했기 때문이다. GTX-A가 일산과 거리를 많이 좁혀줘 편리하지만 안내방송은 심각하게 곤란하다. 한국어를 못하는 영어 네이티브가 녹음해서 연신내를 여시눼라고 말한다.

여초 김응현이 한글+한자 둘 다 잘했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어+영어 둘 다 잘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두 세계를 통섭해줄 수 있는 인물이 두 문화의 중개인이자 가교로서 큰 역할을 하다. 여초 김응현은 7-80년에 중화민국(대만)과 일본에 한국의 높은 문화수준을 알리는 공공외교사절이었고, 중국과 수교이전에 산동에 가서 한국의 서예를 알리기도 했다.



일본 애니의 작화퀄이 아무리 좋아도 고등학교 2시에 수업 끝나고 부활동하는 그들의 문화를 완전히 공감할 수 없다. 국산 애니의 명맥이 유지되어야하는 이유다. 예컨대 <퇴마록>의 버스기사장면이나 편의점 앞 파란색 테이블에서 맥주 마시는 장면은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떤 문화영역은 완전히 아웃소싱줄 수는 없고 내부인으로 꾸려서 우리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해야만한다. 한자가 그렇다.


한자를 포기하면 20세기 중반 이전 모든 유구한 문화를 잃어버린다. 아무리 중국이 자기문자로 서예를 잘해도, 아무리 일본의 서예가 아름다워도 고려, 삼국사기, 이규보의 글을 대신 써주지 않는다. 여초 김응현 서예관에서는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이나 이규보의 한문시와 한글 해석을 볼 수 있었다. 훌륭한 우리 고유의 것, 누군가는 지켜야한다.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의 바둑이 그렇듯, 김연아나 손흥민이 그렇듯 가끔 한국에는 척박한 환경을 딛고 스스로 강해진 자강의 영웅이 나타나 세계에 한국을 알린다. 여초 김응현이 서법예술 분야에서는 동아시아에 한국의 위상을 알렸다. 심지어 70다되어 교통사고를 당해 손을 다쳐 평생 오른쪽으로만 써오다가 다시 왼쪽으로 익혀야하는 시련을 극복해내기까지 했다. 장애물을 넘는 회복탄성력은 젊은 이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냈다. 힘이 덜 들어가는 우수로 유려한 붓놀림을 해내며 또 다른 글자의 맛을 느끼게해주었다. 노익장의 기백은 함성이 아니라 끈기로, 에너지의 방출이 아니라 응축으로, 세 치 혀가 아니라 엉덩이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가 엉덩이로 앉아 수십 만 시간 서예를 연마하고 기법을 조탁한 서재 전경이다.


서재에는 최신 테크놀로지에 발맞추고자 AR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되어있는데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다.

향후 홀로그램, 3D디스플레이가 상용화되면 미술관에서 쓸만할 것 같다. 메타버스와 NFT는 팬데믹때 잠깐 떴다가 완전히 시장이 죽었다. 이용자도 없고 대기업도 철수한다고 한다.


AI 생성기술로 얼굴을 입히고 음성을 복원한 영상도 있다. 생전 모습과 음성으로 미술관 소개를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철학적 화두는 김태용의 <원더랜드>에서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다. 유명 조연배우 최무성이 분한 이용식이 사후 장례식 때 디스플레이 속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김사장! 자네 왔군, 내 돈 갚아야지?"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다. (기억이라 정확한 대사는 아님) 사후 디지털 복원을 할까 말까, 한다면 젊은 시절일까 죽기 전일까 어떤 시점일까, 관리는 누가할까, 자아의식을 갖게되면 어떻게 대해야할까 등에 대해대해 기술-윤리적 질문이 촘촘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다. STS 분야다.



구체적으로 서예의 어떤 부분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는지 대충 캡쳐 필기해서 첨부한다.











아래 춘(봄), 거(갈 거), 화(꽃), 견(두견새) 모두 훌륭하다. 보면서, 와, 와, 와, 와! 거렸다. 마지막 와에 방점.



92년 중국 수교 이전 산동성에 문화교류로 가서 보여준 글씨라고 한다.


와! 와! 와! 와! x 100 

단단하고 강렬하다. 전각에 충실해 옛스러운 본질이 드러나면서 나름의 재해석이 들어갔다.

와 미쳤다. 


이 작품은 정말 대단하다! 이 획이 여기서 이렇게? 그러면서도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다. 재창조 수준이다.


감동의 마음을 물씬 안고 시간을 보니 벌써 1시간이 지났다. 버스가 20분 일찍 온다. 시골은 정해진 시간표랑 다를 때가 있어 늘 주의해야한다. 20분 먼저 떠나 아쉽지만 정말 좋은 작품 잘 보았다!


호사유피라 하였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훌륭한 사람이시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보니 눈에 풍경이 잡힌다. 이것은 작품일까 석재를 깎아낸 흔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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