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한 하루
멜라니아 마추코 지음, 이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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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운명론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운명의 갈래 중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지에 대한 의문은 석연치 않은 게 사실이다. 운명의 우듬지처럼 다양한 색깔을 뽐내고 어떤 선택과 결정에 따라 달리 변한다는 것은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운명의 판도라 상자에서 각자의 삶을 결정지으며 받아들이는 몫은 오로지 자신이다.

 


그로부터 파생된 운명의 향방은 불가피하게 타인과의 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의 삶에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생명의 존귀와 같은 존엄성의 가치를 넘어 신분의 계층과 지위로부터 오는 양극화는 알게 모르게 엄연한 경계선을 구분한다.

 


이 책의 모티브는 운명이다. 인간의 심리 속에 내재된 복잡한 상태를 감정의 선을 따라 정체성을 찾아 가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인간 군상의 롤 모델을 통해 열망, 갈등, 반목, 시기, 질투, 부러움, 죄의식을 시립도록 차갑게 소묘하였다. 모니카 벨루치가 열연한 ⟪말레나⟫에서 보았던 대중심리의 이중적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며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의 시대적 어둠 속에서도 끈끈한 가족애의 결정체를 갈망한 오마주의 흔적이 역력하다.

 


프롤로그의 낯선 총격사건을 뒤로 하고 이야기는 하루 24시간을 따라 째깍거리듯 달려간다. 재선이 불확실 되는 타락한 국회의원 엘리오와 그의 경호 팀장 경장 안토니오의 가족을 중심으로 파상적으로 분포된 갈등의 연결고리를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묶어 전개한다. 구태여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를 이분법적인 도해로 나누어 재단하지 않아도 사회적 계층과 경제력의 척도에 따라 운명이 나뉜다는 일그러진 출발이 이 책을 휘감는 얼개이다.

 


이는 마치 마크 트웨인의 고전 ⟪왕자와 거지⟫의 현대적 해석과 재탄생으로 볼 여지가 충분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 속에 담긴 고전의 순수함과 현대적 의미에 맞게 혼합첨가물을 섞어 일차적 영향의 범주를 확장한 것으로도 보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에서 주는 강한 반어적 의미의 속내는 상당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할 수 없는 삶의 편린들을 등장인물들의 사실적 심리묘사를 통해 재구성해 나간다는 설정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더불어 강한 집착과 강박증세로 인한 편집증과 의처증에 사로잡힌 안토니오를 통해 손창섭의 ⟪잉여인간⟫에서 익히 보았던 현실부적응자를 손쉽게 떠올리게 만든다. 갈피를 잃고 허우적대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정서에 낯익은 인간군상과 오버랩되고 행운과 불행의 갈래에서 얄궂은 운명의 양면성을 그대로 재현한 것과 같은 착각과 익숙함을 엿 볼 수 있다.

 


저자가 창조한 다양한 캐릭터의 사실성을 통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회고하게 되고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녀의 필력을 통해 우리는 대서사적 구조의 지배적 제어와 완벽에 가까운 통제의 정교함에 새삼 놀라게 한다. 진공청소기로 빨아 들이 듯 감각적으로 묘사된 이야기는 우리를 거침없는 몰입의 세계로 빠져 들게 하며 통속적인 관념마저 송두리째 날려 버리게 만든다.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다. 어느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의 몸부림과 손짓은 독자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훔치기에 부족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대립각을 세우는 갈등구조가 조밀하게 짜여 져 있는 것 또한 이 책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엘리오와 안토니오를 주축으로 한 행복과 불행의 뒤엉킨 삶의 향방은 극과 극의 대립적 관계의 설정으로부터 파생된다. 성공을 거머쥔 계층과 성공을 향한 가지지 못한 자의 열망의 범주가 그들 사이를 지리멸렬하게 관통함을 알 수 있다. 거스름처럼 일어난 가난의 굴레가 안토니오와 엠마, 그의 자녀 케빈, 발렌티나를 향해 끈질기게 괴롭히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오염된 늪처럼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또 엘리오와 마샤, 그의 자녀 제로(아리사), 카멜라의 사회적 신분으로 무장한 이중적 심리세계는 탐욕과 부를 향한 열망과 지독한 집착의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였다.

 


이렇게 그들에게서 얽힌 관계의 틀은 운명의 큰 울타리 속으로 쉴 새 없이 돌고 도는 쳇바퀴 속 다람쥐를 연상케 하며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시나브로 넘나든다. 인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는 삶의 오묘한 진리는 인간을 고뇌하고 사색하게 만드는 영원한 화두인지 모른다.

 


정상과 바닥의 간극이 반드시 존재하듯 황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안토니오의 가족들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성찰하고 삶의 목적을 회고하는 계기를 생산할 것 같다. 첨언컨대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이 책의 내용을 음미한다면 숨은그림찾기의 재미와 같은 흥미로움과 묘한 느낌을 오롯이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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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태스킹은 없다 -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멀티태스킹
데이비드 크렌쇼 지음, 이경아 옮김 / 아롬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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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축구에서 현란한 동작과 몸놀림으로 종횡무진 누비는, 일정한 포지션 없이 공격과 수비를 아우르는 포지션을 리베로라고 한다. 대개 이러한 포지션을 멀티 플레이어라고 부른다. 비단 축구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멀티 플레이어에 대한 열광은 다른 분야에까지 그 효과를 미치기 마련이다. 이러한 효과는 일반 사회 저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존경해 마지않는다. 그런 이유로 동시에 여러 가지 업무를 척척해 내는 만능 멀티 플레이어를 대놓고 선호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멀티태스킹이 과연 생산성 대비 효율성이 뛰어날까? 소위 일 잘하고 능력 있는 사람의 업무 스타일에서 오는 즉시성과 동시다발성에 대한 반응에서 일반적인 착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네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보다 빠른 업무처리와 임기응변으로 팔색조의 재능을 갖춘 것으로 넘겨짚어 인식하며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무리 없이 해 내는 것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면 얼마나 우린 지독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걸까?

 


이 책 ⟪멀티태스킹은 없다⟫는 말 그대로 업무수행의 이중성에서 오는 폐해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저자가 지적한 멀티태스킹으로 인해 -외관상 보기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이 보여도- 실상은 실속 없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속빈 강정이란다. 이유인즉슨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던 멀티태스킹은 스위치 태스킹에 다름 아니며 마치 형광등스위치를 켜고 끄는 행위처럼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접어두고 처음부터 다시 집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두서없이 헤매는 것과 똑같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비단 이러한 멀티태스킹의 문제가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문제에만 국한될까? 저자가 짚어 낸 핵심적인 문제는 다중 노출된 업무환경이 오히려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진행하는 것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업무성과가 벌어진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책은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우화형식을 빌려 조근 조근 나열하였다. 직접적이고 실생활에서 언제든지 일어나는 현상을 드려다 보았기에 흔히 접하는 일상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멀티태스킹의 폐해가 기실 엄청난 부작용이 있음에도 개선하지 않고 깨닫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조급함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감이 주요 동인이다.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업무성과에 주안점을 맞추고 그것에 목매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극과도 같은 심리적 위안감이다. 멀티태스킹으로 인해 자신의 드러난 역량이 남들보다 탁월하고 괄목할만한 업무실적을 보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인지 모를 일이다.

 


이 책의 문제의 의뢰자로 등장한 헬렌의 이야기나 직속부하 샐리의 업무일상이 글로벌시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은 효율적인 성과는 시간 관리에 맞닿아 있으며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의 마련이다. 불필요한 시간을 제거하고 업무공조를 통한 시간개념의 재정립은 간과해서 안 될 강력한 무기와 같다.(비즈니스시스템과 개인시스템의 조화) 시간을 다스리는 것은 신뢰를 쌓고 여유를 되돌려 주며 숨은 역량을 발휘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자기관리서적의 공통된 맥락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한 의지를 바로세우는 좋은 지침이 됨을 알 수 있다. 읽다 보면 하나같이 틀린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일상과 닮아 있고 금세 동화됨을 인식하는 것은 통합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좋은 반증이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 바른 길로 인도하고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가짐을 다 잡아 주는 이런 유의 책들은 언제 봐도 행간의 숨은 가치가 분명한 책이기에 명쾌함이 돋보인다. 더불어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대로 따라하다 보면 정말 홍명보 선수같이 멋진 리베로가 되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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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산책하는 낭만제주
임우석 지음 / 링거스그룹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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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제주는 희망을 부풀게 하는 곳이다. 제주에 대한 관념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 또한 아무래도 쉽게 가지 못함에서 오는 거리감일 것이다. 지금이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상태지만 굳이 물리적 거리를 차치하더라도 심리적 거리는 멀기만 하다. 한번 여행이라도 할라치면 큰 맘 먹고 준비를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제주에 대한 동경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품어봄직한 막연한 설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훌훌 버리고 떠나갈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끝없이 속삭인다.

 


이 책 <낭만제주>는 경쾌함이 묻어난다. 형식이나 틀에 구애받지 않고 제주의 푸른 올레길을 따라 작가의 마음 가는대로 소탈한 단상을 날로 옮겼다.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연인과 함께한 제주의 풍광일 게다. 여행이 줄 수 있는 환상적인 순간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에 부럽기 짝이 없는 내용 일색이다. 때로는 사색에 잠겨 상념의 열변을 안주거리 삼아 질겅이게 하기도 하고, 객기를 닮은 호기는 청춘이 주는 열정에 동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연 그대로의 원형을 흠모하는 순수의 감정만이 파상적으로 펼쳐 져 코발트 내음 물씬 풍기는 고즈넉한 맛이 곁으로 흘러넘친다.

 


제주는 자연과 인간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다. 인간의 배타적인 탐욕이 생산한 난개발로 인해 유린당하기도 하고 태곳적 신비 그대로를 고이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걷는 곳 가는 곳곳마다 남태평양의 에메랄드 깊은 눈부심과 싱그런 푸름이 엘돌핀을 폐부 깊숙이 용솟음치게 한다. 아마도 저자 또한 이런 매혹적인 신성함에 도취되어 그리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는지 모른다. 미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 가는 흥분과 낭만은 듣기만 해도 짜릿해 진다. 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개그처럼 읽는 것만으로 부풀어진 가슴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만든다.

 


책은 제주의 마을, 풍광, 이어진 길을 중심으로 때로는 광각의 넓은 풍경을, 때로는 조밀한 사람내음을 담았다. 알려진 곳이 아닌 제주의 석회암처럼 풍화된 기록의 흔적을 모았기에 기존 여행서의 획일성과는 차별화 되는 것이 특색이다. 여느 판에 박힌 가이드가 아닌 점이 무엇보다 마음을 잡아 붙들어 맨다. 그가 찾아 간 이름도 낯선 어느 고즈넉한 마을의 한적함에 심신의 피로감을 몰아내기에는 더 없이 좋을 듯하다. 시간의 색깔을 희석한 예배당의 고풍스러움과 섬사람의 애환을 담은 지신(地神)의 소통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기존의 제주여행은 남과 서를 기점으로 구분한다. 최근에야 올레길의 발굴과 복원으로 쉬엄쉬엄 걸으며 체험하는 곳이 많아졌지만 대개 처음 제주를 찾으면 어김없이 평범한 여행코스를 택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여행 로를 고집하는 것이 나쁠 것까지야 있겠냐마는 이왕이면 저자가 따라 간 길처럼 인적 드문 곳을 따라 흘러가는 것 또한 운치가 있을 것 같다. 이름난 여행지가 최상의 상태를 갖춘다는 것은 자연과 조화로운 개발이 우선이다. 저자가 명소가 아닌 곳만을 밟은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이렇듯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꿈길처럼 아름다운 제주여행의 묘미는 낭만 바로 그 자체다. 어느 순간, 어느 장소든 그(그녀)와 함께라면 추억을 저장하고 감정을 업그레이드 해 줄 것 같다. 이국적인 풍경과 뜻하지 않는 기대감이 숨 쉬는 제주의 아름다움을 이 책에서 제시한 대안여행지로 선택해서 함께 한다면 색다른 추억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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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변명
신명호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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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은 쓰여 지는 자에 의해 달라진다. 기록이나 약전을 바탕으로 기술된다 할지라도 시대적 함의나 색깔에 의해 덧씌워질 수밖에 없다. 분명 역사의 진실은 곡해되기도 와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에 드리운 조각들 중 변하지 않는 진실은 세월의 파고를 깨트리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인식하고 바라보는 세상의 단상들이 모두 일정한 일련의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나에게 있어 조선은 영욕과 번민으로 점철된 끝없는 도전의 역사라 본다. 반목과 대립의 지리멸렬한 갈등은 선혈로 얼룩진 고통의 시간으로 재생산 되었다. 이 책 <왕을 위한 변명>은 절대왕권을 거머쥔 조선의 왕, 회한의 순간을 회고했다. 왕이 되기 위한 과정과 시대적 상황을 실록을 중심으로 객관성을 확보하고 다양한 관점의 시각과 분석을 통해 적절하게 얼버무렸다.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듯 긴장감을 부추기고 왕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그들의 삶을 연민하게 만든다.

 


책은 조선의 27대 왕들 중 10명만을 추슬러 갈무리했다. 어느 누구도 평탄한 운명을 걷지 못한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열망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권력에 대한 집착과 야욕은 피로 맺은 천륜마저 짓밟고 공포, 의심, 질투의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살기 위해 광인이 되기도 하며 모자란 척, 어미의 복수를 위해 황음무도의 광기를 보이는 행위들은 보통의 인간의 의지로서는 넘기 힘든 신산한 삶이었을 게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반역의 칼날은 반복되었는지 모르겠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굴복과 권력찬탈을 위해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무참히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둘러 살육의 역사를 자행한 현장을 아들 태종이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반복의 역사를 잉태하고 재현하는 현재를 들여다보면 삶의 우연이 숙명처럼 퍼진 인과응보를 연상치 않을 수 없다. 과거와 현재는 끊임없는 대화가 빈말이 아님을 절감한다.

 


조선의 왕위세습은 적장자우선의 원칙이었다. 원칙은 예외를 낳기 마련이지만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은 정적으로 내모는 악의 축이었다. 앞서 본 태종이 왕자의 난을 2차례나 일으켜 이복동생을 제거한 사실을 보아도, 그렇고 훗날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보아도, 수양대군(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를 끌어안은 것을 보아도 그렇다. 결국은 왕권을 향한 열망의 구심점으로 자연스럽게 향하는 인간의 허무한 욕망과 직결된다.

 


왕은 드러난 외양과 다르게 고독이 난무한 자리다. 실존적 관념을 애써 덮씌우더라도 외롭기 이를 때 없다. 강인한 의지와 바른 통찰력을 요구받고 위엄과 카리스마를 생산해 내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조선의 왕들은 갖은 원한과 저주의 구심점이었으며 동시에 판단력과 평정심을 방해받는 유혹에 쉽사리 경도되었다. ‘주초위왕’ 따위의 혹세무민으로 개혁의 기치를 올린 조광조와 사림을 제거한 중종과 훈구파. 어미 윤비의 죽음에 빙의된 연산군의 폭정. 저주를 혹신한 극단의 광해군. 그들을 우리는 무능과 광기 어린 일방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중국의 진나라 황제 진시황의 권력을 빗대어 무소불위(無所不爲) 즉,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통칭하여 무한권력으로 대변된다. 봉건주의사회에서 왕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였다. 왕과 대치되는 시각과 의견은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었고 정적으로 낙인 되었다. 이처럼 왕은 강력한 통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시도 긴장감의 고삐를 늦출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 위협하는 정적들의 틈바구니에서 견제와 균형의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공포와 긴장감으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을 뼈저리게 통감한 왕은 바로 고종이었을 것이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봉건과 개혁의 경계를 외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저자가 길어 올린 깊숙한 인간 내면의 고찰은 현재를 사는 우리, 저주와 같은 무자비한 내몰림에 유명을 달리한 비운의 대통령을 만들어 낸, 오늘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 부침과 궤를 같이 한 조선의 왕들의 영욕의 삶은 회고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그들을 통해 청산하지 못한 갈등의 골을 청산하고 화합과 단결로 계층의 벽을 뛰어 넘는 것이 남겨진 자의 숙제가 아닐까? 차원이 다른 폭 넓은 시각을 제공한 더불어 생각거리를 남겨 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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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인간처럼 건강하게 - 몸을 아낀다면 더 많이 움직여라
요르크 블레히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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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협하는 최고의 적은 무엇일까? 난 편리함에서 배어 나온 게으름이라고 본다. 지난 200년의 시간 동안 인간은 인류가 출현한 시간 대비 불과 0.01%의 미미한 시간을 통해 이전의 삶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엄청난 변신을 이루었다. 이처럼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혁신적인 변화는 인간의 삶의 근간형태를 바닥부터 심하게 뒤흔들었으며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육체본위의 사회형태가 지식본위의 사회형태로 재빠르게 이전하였기에 이전 인간의 삶보다 훨씬 육체노동의 비중이 낮아졌음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더불어 분화된 사회구조는 수렵의 흔적마저 지워 버렸기에 애써 수족을 혹사시킬 필요조차 사라진 현실이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편리함 외에도 부작용을 양산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무엇보다 인간이 석기시대부터 진화되어 고착화된 생존의 흔적이 간직된 인체의 사고가 고스란히 우리를 다시금 역공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인류 최대의 적 비만이다. 예전에 비해 덜 움직이고, 더 많이 먹고, 더 쉽게 흥분하게 만드는 우리의 생활 패턴이 그렇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다. 21세기의 주적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반대급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 <석기시대 인간처럼 건강하게>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신체에 담긴 확고부동한 가치를 다룬 이야기이며 진화의 화석 속에 각인된 진실을 고스란히 발굴한 실로 가치 있고 의미심장한 담론이라 하겠다. 기존의 의학적 사고를 뒤엎고 나태함에 빠진 인간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일침을 가하는 내용은 강력한 메시지로 전달된다. 바로 몸을 아낀다면 더 많이 움직일 것을 말이다.




흔히 우리는 질병에 걸리게 되면 의사의 진료를 받고 대개는 요양을 통한 안정과 침상휴식을 처방받는다. 나아가 치료가 힘든 악성질병인 경우에는 꼼짝없이 격리 수용되고 마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누구나 달리 특별한 이의를 하지 않는다. 기실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한 몸으로 회복하는 지름길이 휴식임은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개의치 않게 받아들인 지나친 휴식의 미덕이 오히려 회복을 더디게 하고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 요르크 블레히는 이러한 이면에 가려진 신체의 비밀에 주목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지적한 사실의 근거가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사실이며 과학적 자료를 통한 검증을 분명하게 구축했다는 것이다. 독일인 저자의 치밀함이 돋보이게 하며 담론의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인간의 신체구조는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제 수렵생활로 연명하던 석기시대에는 채집한 음식물을 체내에 다량으로 저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절실 하였다. 신진대사에 필요한 영양분만 소비한 뒤 잉여의 영양분은 지방으로 축적하고 이렇게 저장된 비축에너지는 불안정한 환경을 극복하는 동인이 되었다. 이것은 살기 위한 본능이자 몸부림의 표현이다. 이러한 진화의 속도는 호모사피엔스를 정점으로 현재의 인간에게까지 이르렀음은 알려진 바와 같다. 따지고 보면 신체의 활동적인 유전자는 내재된 기억에 다름 아니다.




진화의 내부에 모습을 감춘 유전형질은 인간을 쉴 새 없이 자극하는 거추장스런 요인으로 작용한다. 덜 움직여도, 과잉 섭취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런 변화를 바라는 것은 요행에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실제사례를 통해 나타난 효과와 결과물은 인간의 생체리듬이 지속적으로 부단하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에 맞추어 져 있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보여 증명하는 표식이다. 신체의 유연함을 유지하고 활발한 피돌기를 통해 순환이 막힘이 없고 지속적인 시냅스의 자극으로 뉴런이 생산된다는 진실을 인식한 것은 불과 4반세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저자의 운동혁명은 선택과 강요를 넘은 생존에 다르지 않다.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 저자는 운동을 꼽는다. 저자의 강력한 주장이 현대를 사는 우리를 살리는 길일지도 모른다.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 양성종양, 치매, 우울증과 같은 심각한 질병이나 삐걱거리는 신체는 불용불설의 오차 없는 적용이다. 근육이 위축되고 혈관이 오그라드는 만큼 인간의 수명 또한 줄어들고 피폐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진실은 무서운 현실이다. 




이 책을 파고든 움직인다는 동적 사고는 광범위한 대중성을 확보할 명분이 뚜렷하다. 하지만 운동의 중요성을 건강하게 살기 위한 방편으로 낮추고 지극히 보편적인 가치수준으로 인식한다면 크게 개선되거나 달라질 게 없다. 위약효과(플라시보)처럼 인간을 매혹시키고 강인한 의지와 목표에서 오는 순수한 착오가 인간을 이롭게 할 방편인지 모르겠다. 그저 운동이 건강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일반화로 격하된 담론을 끄집어내야 한다. 우리 몸에 깃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보호본능의 놀라운 힘과 비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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