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한 하루
멜라니아 마추코 지음, 이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평소 운명론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운명의 갈래 중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지에 대한 의문은 석연치 않은 게 사실이다. 운명의 우듬지처럼 다양한 색깔을 뽐내고 어떤 선택과 결정에 따라 달리 변한다는 것은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운명의 판도라 상자에서 각자의 삶을 결정지으며 받아들이는 몫은 오로지 자신이다.

 


그로부터 파생된 운명의 향방은 불가피하게 타인과의 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의 삶에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생명의 존귀와 같은 존엄성의 가치를 넘어 신분의 계층과 지위로부터 오는 양극화는 알게 모르게 엄연한 경계선을 구분한다.

 


이 책의 모티브는 운명이다. 인간의 심리 속에 내재된 복잡한 상태를 감정의 선을 따라 정체성을 찾아 가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인간 군상의 롤 모델을 통해 열망, 갈등, 반목, 시기, 질투, 부러움, 죄의식을 시립도록 차갑게 소묘하였다. 모니카 벨루치가 열연한 ⟪말레나⟫에서 보았던 대중심리의 이중적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며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의 시대적 어둠 속에서도 끈끈한 가족애의 결정체를 갈망한 오마주의 흔적이 역력하다.

 


프롤로그의 낯선 총격사건을 뒤로 하고 이야기는 하루 24시간을 따라 째깍거리듯 달려간다. 재선이 불확실 되는 타락한 국회의원 엘리오와 그의 경호 팀장 경장 안토니오의 가족을 중심으로 파상적으로 분포된 갈등의 연결고리를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묶어 전개한다. 구태여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를 이분법적인 도해로 나누어 재단하지 않아도 사회적 계층과 경제력의 척도에 따라 운명이 나뉜다는 일그러진 출발이 이 책을 휘감는 얼개이다.

 


이는 마치 마크 트웨인의 고전 ⟪왕자와 거지⟫의 현대적 해석과 재탄생으로 볼 여지가 충분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 속에 담긴 고전의 순수함과 현대적 의미에 맞게 혼합첨가물을 섞어 일차적 영향의 범주를 확장한 것으로도 보아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에서 주는 강한 반어적 의미의 속내는 상당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할 수 없는 삶의 편린들을 등장인물들의 사실적 심리묘사를 통해 재구성해 나간다는 설정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더불어 강한 집착과 강박증세로 인한 편집증과 의처증에 사로잡힌 안토니오를 통해 손창섭의 ⟪잉여인간⟫에서 익히 보았던 현실부적응자를 손쉽게 떠올리게 만든다. 갈피를 잃고 허우적대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정서에 낯익은 인간군상과 오버랩되고 행운과 불행의 갈래에서 얄궂은 운명의 양면성을 그대로 재현한 것과 같은 착각과 익숙함을 엿 볼 수 있다.

 


저자가 창조한 다양한 캐릭터의 사실성을 통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회고하게 되고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녀의 필력을 통해 우리는 대서사적 구조의 지배적 제어와 완벽에 가까운 통제의 정교함에 새삼 놀라게 한다. 진공청소기로 빨아 들이 듯 감각적으로 묘사된 이야기는 우리를 거침없는 몰입의 세계로 빠져 들게 하며 통속적인 관념마저 송두리째 날려 버리게 만든다.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다. 어느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의 몸부림과 손짓은 독자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훔치기에 부족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대립각을 세우는 갈등구조가 조밀하게 짜여 져 있는 것 또한 이 책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엘리오와 안토니오를 주축으로 한 행복과 불행의 뒤엉킨 삶의 향방은 극과 극의 대립적 관계의 설정으로부터 파생된다. 성공을 거머쥔 계층과 성공을 향한 가지지 못한 자의 열망의 범주가 그들 사이를 지리멸렬하게 관통함을 알 수 있다. 거스름처럼 일어난 가난의 굴레가 안토니오와 엠마, 그의 자녀 케빈, 발렌티나를 향해 끈질기게 괴롭히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오염된 늪처럼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또 엘리오와 마샤, 그의 자녀 제로(아리사), 카멜라의 사회적 신분으로 무장한 이중적 심리세계는 탐욕과 부를 향한 열망과 지독한 집착의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였다.

 


이렇게 그들에게서 얽힌 관계의 틀은 운명의 큰 울타리 속으로 쉴 새 없이 돌고 도는 쳇바퀴 속 다람쥐를 연상케 하며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시나브로 넘나든다. 인생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삶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는 삶의 오묘한 진리는 인간을 고뇌하고 사색하게 만드는 영원한 화두인지 모른다.

 


정상과 바닥의 간극이 반드시 존재하듯 황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안토니오의 가족들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성찰하고 삶의 목적을 회고하는 계기를 생산할 것 같다. 첨언컨대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이 책의 내용을 음미한다면 숨은그림찾기의 재미와 같은 흥미로움과 묘한 느낌을 오롯이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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