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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위한 변명
신명호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평점 :
역사의 창은 쓰여 지는 자에 의해 달라진다. 기록이나 약전을 바탕으로 기술된다 할지라도 시대적 함의나 색깔에 의해 덧씌워질 수밖에 없다. 분명 역사의 진실은 곡해되기도 와전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에 드리운 조각들 중 변하지 않는 진실은 세월의 파고를 깨트리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인식하고 바라보는 세상의 단상들이 모두 일정한 일련의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나에게 있어 조선은 영욕과 번민으로 점철된 끝없는 도전의 역사라 본다. 반목과 대립의 지리멸렬한 갈등은 선혈로 얼룩진 고통의 시간으로 재생산 되었다. 이 책 <왕을 위한 변명>은 절대왕권을 거머쥔 조선의 왕, 회한의 순간을 회고했다. 왕이 되기 위한 과정과 시대적 상황을 실록을 중심으로 객관성을 확보하고 다양한 관점의 시각과 분석을 통해 적절하게 얼버무렸다.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듯 긴장감을 부추기고 왕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그들의 삶을 연민하게 만든다.
책은 조선의 27대 왕들 중 10명만을 추슬러 갈무리했다. 어느 누구도 평탄한 운명을 걷지 못한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열망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권력에 대한 집착과 야욕은 피로 맺은 천륜마저 짓밟고 공포, 의심, 질투의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살기 위해 광인이 되기도 하며 모자란 척, 어미의 복수를 위해 황음무도의 광기를 보이는 행위들은 보통의 인간의 의지로서는 넘기 힘든 신산한 삶이었을 게다.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반역의 칼날은 반복되었는지 모르겠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굴복과 권력찬탈을 위해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무참히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둘러 살육의 역사를 자행한 현장을 아들 태종이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반복의 역사를 잉태하고 재현하는 현재를 들여다보면 삶의 우연이 숙명처럼 퍼진 인과응보를 연상치 않을 수 없다. 과거와 현재는 끊임없는 대화가 빈말이 아님을 절감한다.
조선의 왕위세습은 적장자우선의 원칙이었다. 원칙은 예외를 낳기 마련이지만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은 정적으로 내모는 악의 축이었다. 앞서 본 태종이 왕자의 난을 2차례나 일으켜 이복동생을 제거한 사실을 보아도, 그렇고 훗날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보아도, 수양대군(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좌를 끌어안은 것을 보아도 그렇다. 결국은 왕권을 향한 열망의 구심점으로 자연스럽게 향하는 인간의 허무한 욕망과 직결된다.
왕은 드러난 외양과 다르게 고독이 난무한 자리다. 실존적 관념을 애써 덮씌우더라도 외롭기 이를 때 없다. 강인한 의지와 바른 통찰력을 요구받고 위엄과 카리스마를 생산해 내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조선의 왕들은 갖은 원한과 저주의 구심점이었으며 동시에 판단력과 평정심을 방해받는 유혹에 쉽사리 경도되었다. ‘주초위왕’ 따위의 혹세무민으로 개혁의 기치를 올린 조광조와 사림을 제거한 중종과 훈구파. 어미 윤비의 죽음에 빙의된 연산군의 폭정. 저주를 혹신한 극단의 광해군. 그들을 우리는 무능과 광기 어린 일방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중국의 진나라 황제 진시황의 권력을 빗대어 무소불위(無所不爲) 즉,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통칭하여 무한권력으로 대변된다. 봉건주의사회에서 왕의 권력은 실로 막강하였다. 왕과 대치되는 시각과 의견은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었고 정적으로 낙인 되었다. 이처럼 왕은 강력한 통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시도 긴장감의 고삐를 늦출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 위협하는 정적들의 틈바구니에서 견제와 균형의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공포와 긴장감으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을 뼈저리게 통감한 왕은 바로 고종이었을 것이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봉건과 개혁의 경계를 외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저자가 길어 올린 깊숙한 인간 내면의 고찰은 현재를 사는 우리, 저주와 같은 무자비한 내몰림에 유명을 달리한 비운의 대통령을 만들어 낸, 오늘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 부침과 궤를 같이 한 조선의 왕들의 영욕의 삶은 회고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그들을 통해 청산하지 못한 갈등의 골을 청산하고 화합과 단결로 계층의 벽을 뛰어 넘는 것이 남겨진 자의 숙제가 아닐까? 차원이 다른 폭 넓은 시각을 제공한 더불어 생각거리를 남겨 준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