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1반 34번 - 종잡을 수 없는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이야기
언줘 지음, 김하나 옮김 / 명진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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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움이란 거대한 산을 만나는 것과 같은 위압감일지 모르겠다. 누구나 한 번 즈음은 넘어가야 할 태산임에도 어느 누구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곳이 험난한 곳인지 희망이 가득한 즐거움이 가득한 곳인지 아무도 일러 주는 이가 없다. 단지 어른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을 재단하려 하고 기성사회가 만든 틀 속에 가두려는 시도만을 지속적으로 할 뿐이다.




이처럼 아이가 처음으로 사회라는 제도화된 규범 틀과 대면하는 첫 세상은 학교에 입학할 즈음인 것 같다. 이제껏 통제와 명령에 익숙하지 않던 아이들은 제도화된 교육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면 아이 속에 깃든 자유의지는 매몰되는 모양새를 띤다. 서열화, 능력화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는 아이들 속에 담긴 자의식의 실현과 개성의 발굴은 공염불에 불과해 보인다.




이 책 <1학년 1반 34번>의 저자 언줘는 유년기 시절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감성어린 삽화에 스며 아름답게 녹여냈다. 마치 일기를 써 내려가듯 담담히 적은 글은 오히려 무채색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심리를 따라 변해 가는 감성구조는 관조적인 시각에 길든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숨어 있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미명아래 오래도록 우리가 가진 꿈이나 바람을 포기한지 오래다. 쫓기듯 다가오는 치열한 경쟁사회의 틀 속에서 넘어지고 깨지기에 익숙해지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경쟁사회에서 승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 바라는 것임에도 무언가 허전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 동안 잊고 지내 온 우리 마음속에 꽁꽁 숨겨둔 자유라는 또 다른 나가 비집고 나오려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가 1학년1반34번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은 기성세대가 재단한 범주 내에서 벗어나는 즉 부정과 회피이다. 이야기 속 34번은 사회화에 부적응한 주변인, 낙오자일 뿐이다. 아이가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의 능력이 부족해서이며 선험적으로 경험한 확률에 따라 의지박약의 부진아에 다르지 않다. 하지만 누가 34번을 부진아로 낙인찍을 수 있을까? 34번이 부진아라는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아이에게 억지로 끼워 맞춰 입혀야 하는 이유를 누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34번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진리는 스스로 적응하며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올챙이 샤오헤이를 통해 개구리로 성장해 가는 과정은 아이에게는 신기한 세상이며 너무도 자연스럽다. 반면 34번이 아닌 타자는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강조한다. 이러한 체계는 34번의 행동을 겉돌게 하며 문제아로 몰아 붙여 어디에도 설 곳이 없게 한다. 34번이 어른들이 만든 세계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의 기준은 흑백논리에 의해 규정된 거짓인 것이다. 거짓은 잘못이며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불변의 가치로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인식된다.




아이가 원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또한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은 명확하게 구별된다. 이처럼 모순된 현실은 아이에게는 두려움과 동등한, 차원이 같다. 모든 사회 구조는 어른이 만들어 낸 보편타당하다는 논리원칙에 맞춰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아이에게 자의식이나 자유의지가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마저 묵인한 채 도출해 낸 견고한 틀에 지나지 않는다. 개성을 부각시키고 숨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것이 누구나 아는 교육의 이상이자 목적이다. 전인교육을 통한 교육의 기치는 건전하고 유연한 사고를 지닌 창의적인 인재를 발굴하는 것에 있다.




현실은 34번이 바라 본 것과 같이 아이들을 평균화 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며 창의성을 매몰시키게 하며 아이의 도드라진 개성은 오히려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것 같다. 아이가 가진 재능은 평균화라는 구조 속에 함몰되고 서열화를 위한 재능만이 오롯이 살아남는다. 이처럼 목적과 현실의 비현실성은 서열화의 비대칭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서열화로 인해 발생한 선긋기는 뒤쳐진 아이에게 기회보다는 오히려 사회 속에서 배제되고 도태시키는 것이 냉혹한 살벌한 현실이다. 모든 아이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음에도 뒤처지는 것을 참아내고 용인하지 못하는 구조이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모순된 구조를 알면서도 개선시키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대안 교육의 부재와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장하는 사회 저변에 깔린 의식에 있다.




저자가 34번을 통해 꼬집은 속내는 책임과 자유에 대한 접근방식의 오류 및 주입식 교육에서 기인한다. 간섭은 자유의지를 꺾고 책임감을 몰아낸다. 이제라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열린 교육을 통한 아이의 감성을 보듬는 자세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본적 자질을 함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럼없이 자신의 재능을 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며 순응이 아닌 적응할 수 있는 배려가 우선이 아닐까.




이 책은 단순함에서 오는 명료함이 탁월한 책이다. 행간에 숨은 강력한 메시지가 폐부 깊숙이 찌르는 아픔이 전해 온다. 어느 누구도 34번이 받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이가 없다.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은 기성세대로서의 책무를 져 버리는 것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의 눈에 맞춘 감성과 그에 맞는 조화를 이루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1학년1반34번과 같이 절름발이로 내모는 모순으로 점철된 기형적인 세계를 더 이상 우리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2009.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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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존 하워드 그리핀 지음, 하윤숙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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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 중 타자에 대한 멸시와 조롱은 본질에서 연유하는 모양이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보편적인 인습과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 붙은 것이 인종 간 대립과 반목이지 않을까 싶다. 단지 바꿀 수 없는 것, 생래적인 차이로부터 말미암은 다름으로 구별 짓는 것은 어느 곳에나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고질병과도 같은 암적인 존재라 하겠다.

 


이 책 <블랙 라이크 미>의 저자 존 하워드 그리핀은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백인가정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가 흑인으로 위장하여 겪은 흑인에 대한 차별과 백인의 사악한 감정과 경계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미국사회의 인종 간 차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고 넓다. 그가 인종의 벽을 허물고자 목숨을 건 인종 간 끌어안기는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함 그 자체다.

 


"무엇을 위해 그런 위험한 일을 시도하였는가?" 라는 당시 주류 백인사회의 경멸적인 태도와 안일한 시선에 담대한 용기로 맞선 그의 행적은 신화적 일화로 수많은 미국인들의 가슴속 깊이 각인되어 기록되었다. 그의 위대한 도전은 인간의 비열함과 이중성에 담긴 괴기스러운 행위에 경종을 울리는 일로 기억되었다.

 


저자의 눈을 통해 보고 느끼고 짓눌린 일을 불과 몇 백 그램의 활자로 읽고 있는 자신이 내심 부끄러워지게 하고 숙연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우리에게 미국은 기회와 능력이 보장되는 꿈의 나라이다. 그곳에 아직도 봉건주의 사회에서나 있음직한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는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 한다. 더구나 차별과 편견의 잣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주류백인사회의 비열한 시각은 가히 실망을 넘어 분노를 감출 길이 없게 만든다.

 


인종 간 편견과 차별의 시각은 비단 미국의 흑백 간 갈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저자의 복잡다단한 삶이 잘 대변해 주 듯 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유럽을 공포로 몰고 간 소위 인종대청소, 홀로코스트는 미국의 흑백 간 차별과 비슷한 유형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의 씨앗은 유대인에 대한 오랜 편견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미국 백인사회가 흑인에게 보여 준 차별은 독일인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는 다른 상대적인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저자가 흑인으로 변장하여 지낸 7주 동안 미국의 남부지역을 관찰하며 경험한 사실은 핵심에는 이중적 양심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백인이었던 동안 보였던 백인들의 태도와 흑인으로 바뀐 뒤 그들의 태도는 교묘함으로 위장한 위선적 태도의 일색이다.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에 대해 연구하고 배운 지식인들조차도 흑인들에 대한 시선은 백인의 배려를 기초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우월적 태도를 고수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지옥과 다르지 않다. 마시고 싶어도 쉬고 싶어도 백인들의 따가운 눈총과 멸시를 이겨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쌓아온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는 비참한 삶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과 자유로 직결된다.

 


이러한 환경과 조건은 인종 간 갈등의 골을 깊게 드리우게 한 당시 미국 사회의 내밀한 모습이었다. 기본적인 인권조차 향유하지 못하는 흑인사회의 처참함은 바로 백인주류사회가 낳은 타자, 몰아내기 그 자체였다. 오랜 기간 동안 백인들의 노예로 살아 온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기구한 삶은 나아질 것도 물러날 것도 없는 벼랑 끝 그 자체의 원형적 삶이었다. 이러한 암흑과도 같은 그들의 삶이 저자의 의미심장한 행위로 흑인사회를 깨우고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기에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반세기가 지난 이후 저자의 행적과 삶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은 미국이 선택한 새로운 희망의 지도자 버럭 오바마와 무관치 않으리라 본다. 흑인의 인권과 평등을 부르짖으며 무폭력저항운동을 벌이다 순열한 삶을 살아 간 많은 흑인 지도자의 치열한 염원이 이제 그 중심에서 표출되어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인권을 유린하던 차별법이 개정되었다 하더라도 쉽사리 백인들의 가슴 한 곳을 차지하던 차별의 시선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화합과 소통이 요원한 근원적 이유는 피부색을 떠나 인간이 가진 음험하기 짝이 없는 악행의 산물일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집단 성원 내에도 어떠한 구별과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가 만든 질서라는 명분으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본성인 모양이다.

 


우리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다름에 의한 차별은 사회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다. 피부색의 차별은 동남아인들의 타자로 돌려세우고 애매한 시선과 날선 차별을 시도한다.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근거 없는 고정관념과 경제적 약자에 다름 아닌 그들을 유린하는 그것은 집단배타주의의 빗나간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총체적인 역경과 경제적 혼란을 뛰어 넘을 중요한 해결책은 다름 아닌 소통에 있다. 저자가 위선이라는 가면을 통해 바라보았던 처참한 기록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하겠다.

 


'나처럼 검은' 사람이란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Human Like Us)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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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Speed Reading 영어 속독법 : 입문편 - 토익 토플 텝스 SAT 수능의 정복자 English Speed Reading 영어 속독법 4
신동운 지음 / 스타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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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독은 집중력과 몰입의 과학이다.


 


인간의 두뇌는 현재의 의학기술로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한계용량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일치된 의견을 보인다. 그런 이유로 최근 들어서 뇌를 개발하고 인간의 잠재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뇌와 지식의 습득의 상관관계는 누구나 인정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하기에 이 책 <English speed reading 영어 속독법 입문편>은 기존의 어학도서의 얼개를 뛰어 넘는다. 저자 신동운이 선보인 책이 내용은 뇌의 실체적인 분석과 연구를 통해 가히 혁명적인 영어 속독교수법을 자기만의 색깔로 덧씌우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이게 영어책인지 두뇌 개발 책인지 한참을 헛갈리게 할 만큼 파격적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대강은 이러하다. 속독을 위한 방편으로 뇌의 체계적인 이해를 돕고자 뇌의 기능적 설명을 곁들여 놓았다.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원리와 피돌기 즉 혈액순환과 산소의 공급 및 영양분의 수급의 상관관계가 어떠한지를 살피고 있다. 제법 상당한 분량을 영어속독과는 무관한 뇌와 관련한 일반 지식으로 채웠다.

 


여기까지 읽어 내는 동안, 나 또한 고정관념이라는 떨쳐 버리기 힘든 외투를 걸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고정관념이란 우리의 사고체계를 지배하는 신경계의 오랜 인류의 역사의 방증이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집중하여 몰입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무관한 일과 구별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작업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더 많은 피돌기를 요구한다. 그로 인해 교감신경계가 자극을 받게 되고 무의식중에 우리의 몸은 태곳적 본능인 소위 전투상태로 돌입한다고 말한다.

 


결국은 이것이 바로 스트레스 상태에 진입함을 의미한다. 스트레스의 지속 상태는 산소의 원활한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피돌기가 힘들어지며 손발이 오그라들게 된다고 한다. 이른바 몸의 평정은 무너지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에 극도의 긴장된 순간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와 일치한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평상심을 유지하고 부교감신경계의 완전 지배로 약간의 적절한 긴장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최상의 상태라 말한다.

 


저자는 뇌의 일반적인 관점을 통해 몰입교육과 접붙이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가 솔깃한 것은 두뇌의 개발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가 제시하는 뇌의 변신을 받아들인다면 흔히 말하는 멀티플레이어가 가진 출중한 능력과 닮아 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저자가 추구하는 인간의 뇌의 기능 중 최적의 상태이자 바람직한 모습이며 잠자는 뇌를 깨워 흔드는 혁명적인 방법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속독의 체계적 접근에 있다. 책의 절반 이상을 영어읽기와는 무관한 부분에 상당부분을 할애할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은 저자의 사상과 철학이 맞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행간을 읽어 내고 근시안적인 안목을 거시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체계적인 사고체계의 훈련을 통해 기존의 공부 방법과의 결별을 시도한 셈이다.

 


알고 보면 간단한 원리와 이치인데 진즉 이런 방법을 몰랐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새삼 저자의 이론적 원리와 배경이 신기하기만 하다. 세세히 살펴보고 돌이켜 보면 인간의 상호작용은 원인과 결과의 명쾌한 구조를 띤다. 그것을 인식하느냐 마느냐는 자유의지와 무의식의 경계를 지배하는 다름 아닌 자신일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이 본인이 의도한 영어속독시리즈의 시발점인지라 개념적 이해를 돕고자 가급적 실전의 무게를 가볍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그가 제시하는 방법과 훈련을 통해 익숙해지는 것이 먼저이겠다. 그런 연후 실전에 돌입한다면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물이 산출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 기간 영어를 배우고 접했으나 나아가지 못함은 접근방법의 잘못이 태반이기에 이제라도 접근의 메커니즘을 저자에 맞춰보는 일도 자못 흥미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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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 공화국, 누가 우리 아이의 재능을 죽이는가
안드레아스 잘허 지음, 송경은 옮김 / 서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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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뛰어난 사람을 지칭한다. 이만큼 영재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을 상회하는 능력이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전제를 두고 판단한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영재로서의 특성과 자질은 누구에게나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유한특정성은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간을 영재로 둔갑하려는 착각 내지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나의 아이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을 마다할 부모가 있을까? 제 나이 또래를 훌쩍 뛰어넘는 탁월한 재능과 비범한 능력을 보인다면 어찌 방치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아이의 재능에 관대하였는지, 제대로 된 교육적 토양을 배양하여 주었는지, 교육행정의 다양한 기회의 제공 및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지, 보호자로서의 제 역할을 다했는지에 대해 반드시 묻고 따져 보아야 할 문제라 할 것이다.

 


이 책 <영재공화국>은 독일의 정치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안드레아스 잘허가 자국 내 무너지는 공교육환경을 냉철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구태의연한 교육행정으로 인하여 사장되어 버리는 아이의 재능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토양과 새로운 대안환경을 제시하고 나섰다. 저자는 인접한 국가인 오스트리아의 사례와 교육선진국인 싱가포르, 창의성의 나라 미국의 교육환경을 사례로 들어 신랄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교육은 만년지대계라 한다. 또한 교육은 올바른 자의식을 배양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인교육이 목표가 된다. 더불어 아이의 특성과 적성에 따라 타고난 재능을 일구고 모자란 분야를 보완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가 된다. 하지만 교육적 목표와 현실은 일정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이의 참된 재능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학교, 교사, 부모의 제 역할이 밑바탕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사상적 기저에도 아이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는 것의 배경으로 적성과 능력에 부합하는 교육적 환경조성이 보다 시급함을 내세운다. 그가 말하는 영재의 관념이 기존의 우리 사회가 바라본 것과 다르지 않음에 놀라게 한다. 유아기적 신동이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면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어 버리는 현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국가적 문제에 방증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공교육의 붕괴현상은 교사에 대한 위상 실추와 공교육의 획일화와 불신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찾는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에서 또한 얼마만큼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는지는 누구나 인식하고 공감하는 문제다. 문제의 왜곡 분출은 사교육시장으로 몰리게 하고 양극화에 따른 교육기회의 균점마저 형평성을 잃게 만들었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난다. “는 말은 잊혀진지 오래다.

 


저자가 바라 본 독일의 교육시스템의 심각성은 교사의 자질과 정부의 교사육성부재에 일차적 원인을 묻는다. 무능력한 교사의 순환적 퇴출구조가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져야 교육이 살고 아이의 재능이 돋보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교육자의 육성에 정부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며 현재의 관료주의적 사고로 인한 경직화된 교육정책의 후진성향을 통렬하게 되짚었다.

 


교사의 책임이 그 어느 누구보다 크다는 것은 통감하지만 교사의 처우문제에 대해서는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난해한 문제를 오롯이 교사에게만 전가하려는 미루기의 전형이다. 교사의 질적 개선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아이의 교육적 혜택이 군더더기 행정잡무에 묻혀 사라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교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보장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아이의 재능은 기성세대 모두의 책임이며 인식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한다. 부모는 교사의 책임을 묻기 이전에 부모로서의 자질과 아이에 대한 애착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어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이러한 건전한 교육적 토양이 대내외적으로 배양되고 정부의 일관되고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정책이 흔들림 없이 시행된다면 공교육의 부활은 힘든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아이의 재능은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 아닌 관심을 통해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교육환경에 대한 기존의 시스템과 패러다임을 변환하고 조급함에서 벗어나 아이의 잠재된 재능을 살리는 것에 주력하여야 한다. 조기교육을 통한 아이의 재능을 발굴하는 것 또한 중요하나 부모의 눈높이로 아이를 재단하려 하는 시대착오적 행위를 중단하여야 한다. 이는 잠재했던 능력 또한 매몰되고 상실되어 버릴지 모를 일이다. 아이와의 열린 대화를 통한 조력자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상호소통의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며 사회적 파수꾼인 인식 있는 교사로서의 자리매김을 다 할 때 일그러진 교육현장을 개선할 수 희망의 불꽃을 피울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듯 불편한 교육계에 대한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이다.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아이의 눈을 통해 아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더불어 학교와 교사를 통한 내적인 자기변신을 통해 잃어버린 열정과 주인의식 및 상호간 가치인정의 온전한 자리매김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 하겠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실추한 교권의 확립과 절로 흥겨워지는 신명나는 학교로 거듭날 것이다.

 


독일은 동서독 통합을 원만하게 이루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경제대국이며 선진국이다. 이러한 나라의 저자가 교육계의 비현실적 관행과 만연한 교육의식에 대하여 펜을 든 것은 다름 아닌 교육의 성공이 곧 나라의 흥망성쇠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비단 저자가 독일사회의 성찰과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로 이 글을 써 내러 갔다 할지라도 우리의 현재와 다르지 않은 것은 더 이상 변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음에 있다. 저자를 통해 교육계의 현실을 성찰하고 각성할 수 있는 가늠좌가 될 여지가 충분한 책이다.

 


미래 사회를 짊어지고 갈 아이들에게 이분법적 편 가름으로 아이들을 나누는 어리석음을 그치지 않는다면 하향평준화를 통한 질적 저하의 위기는 마치 내리막길을 걷는 것처럼 불을 보듯 뻔하다. 정보화시대에 역행하는 산업화시대의 유물인 허울 좋은 학교를 벗어 버리고 생동감 있고 활기찬 교육환경이 조성되기를 기원해 본다.

 


   
  훌륭한 교사는 예전이나 앞으로나 2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해요. 따뜻한 마음(감성)과 활발하게 돌아가는 두뇌(이성), 다시 말해 다정함과 엄격함이죠. 어느 것 하나 빠져선 안 돼요. 저마다 이를 요구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것이 필요한 적재적소의 순간을 알려줘요. 언제 부드러움을, 언제 엄격함을 보여야 하는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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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미치다 -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전상인 지음 / 이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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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파트, 대한민국 사람치고 아파트와 얽히지 않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든지 간에 아파트와 관련한 일화 한 토막은 누구든 쉽사리 읊조린다. 아파트로 인해 계층이 나뉘고 심지어 전인격마저 부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원래 그것이 가진 본연의 목적인 주거의 기능은 희석되고 오로지 교환가치로서의 기능이 우위를 차지한 해괴망측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 <아파트에 미치다>의 저자 전상인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주거형태인 아파트에 대한 사회문화적 고찰과 더불어 환경적 담론에 대해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아 펴냈다. 아파트에 얽힌 사회공동체적 특성을 이해하고 분석을 통해 아파트가 품은 이데올로기를 현대 사회의 주류적 가치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또한 탁월한 감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아파트의 기능적 요인을 사례를 통해 흥미롭게 채워 넣었다.

 


책은 아파트의 기원인 건축사적 기원을 소개로 아파트가 한국사회에 고착화되고 현재의 그것으로 재편되기까지의 연대기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아파트가 진화하기 시작한 시점을 박정희정권을 즈음으로 보고 있다. 국가산업발전계획에 의거하여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과 주거안정의 목적아래 주택공사에서 보급하기 시작한 공동주택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파트의 촉발제가 되었음을 말한다.

 


이를 통해 처음 소개된 아파트는 전통적인 한옥구조에 익숙한 우리의 정서와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구조와는 이질감으로 인해 별반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하지만 경제개발에 의한 산업화 시대로의 이행은 전형적인 가족구조를 허물고 핵가족화 및 개인주의가 보다 강화되는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되며 대중적 인기를 모았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구조의 산업화, 정보화시대로의 이행이 아파트에 대한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생성하게 하고 골목문화를 퇴보시키며 폐쇄적인 개인가치에 중점을 두는 공동체관을 형성하는 기저로 파악하였다. 분명 저자가 짚은 아파트가 가진 외형적 편리보다 내면적 변형은 더 큰 왜곡현상을 도출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요세공동체의 형성과 같은 환경적 변화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라 하겠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 실제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기 시작한 기저에는 경제적 함수관계가 치밀하게 깔려 있다. 아파트 건설로 인한 경제성장유발효과는 엄청난 잠재가치를 촉발시키고 경제의 흐름을 순탄하게 이어주는 효자산업으로의 역할을 하는 것에 있음은 정부로서는 묵과하지 못할 중요한 요인이다.

 


경제적 유발효과 외에도 점차로 아파트 자체가 개인의 부를 측정하고 투자가치로서의 기능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에도 우리가 아파트에 미치게 하는 근원적인 요인이 깃들어 있다. 초고층 아파트에 평당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줄을 서는 세태는 계층 간 주거형태의 동질성이 주는 한계에서 저자는 이유를 찾고 있다.

 


이러한 아파트 편중현상은 계층 간 양극화의 조장과 구성원 간 갈등을 조장하는 진원지가 되고 있음은 암울한 자화상이다. 저자는 아파트에 대한 단조로운 시각을 접고 입체적인 변화를 통해 서구와 같은 오랜 기간 숙성된 고급주거문화의 사회적 용인을 기대하고 있다. 계층 간 이동이 유연하고 기회의 균점으로 누구든 진입이 자유로운 환경에 주안점을 두고 역설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파트가 사회학적으로 여권을 신장하는 계기로 보았다는 점에 있다. 아파트의 수평적인 구조는 전통의 가옥구조의 수직적 구조를 붕괴하고 신체가구의 발달은 여성의 대중적 권력을 쟁취하는 권리신장의 계기로 보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사회참여가 전방위적인 영역으로 확대 이행하는 것에 아파트와의 연관성을 연결시켜 이해한 시도는 독특한 시각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중산층 계층을 형성하는 일등공신으로 여성의 힘, 특히 미시의 권력이 지대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분명 아파트가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근원이 됨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60%가 40평형대의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한다. 드러내지 않은 속내는 암묵적 합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로자 임금으로 17년을 전부 모아도 집 장만 못한다는 뉴스는 이제 더 이상 충격적이지도 않다. 21세기 신유목민시대가 멀지 않았음은 예고하는 불우한 미래의 모습이다.


저자가 제시한 주거문화의 개혁은 미봉책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아파트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아파트에 대한 투기수요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청년계층의 실업난 해소와 과잉 부담을 유발하는 주거문제로만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근원적인 해결은 고사하고 또 다른 불평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아파트에 대한 거품은 당분간은 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격적인 요동은 있을 수 있겠지만 아파트에 대한 집착과 수요는 새로운 대체제의 등장과 구미에 맞는 반대급부가 있지 않는 이상 요원한 일로 비친다. 그렇다면 아파트에 대한 획일화된 방식의 개발보다 다양한 건축방식 및 임대방식의 도입으로 접근의 패러다임을 변화하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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