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안해라고 부르는 옛말이 있다. 아내의 어원이 어디에서 유래했느냐 데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중 아내(안해)를 '집 안의 해sun'라는 좋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내에 대한 호칭이 무엇이든 생애를 통틀어 가장 밀접하고 살가운 사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감정이 무뎌지고 옅어져 남남처럼 냉랭한 사이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소중함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몰라서다. 적게는 20여년 많게는 40여년을 남남으로 살다 살 부비며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여간 인연이 아니다.
아내에 대해 시답잖은 썰을 푸는 이유는 지금 아내는 부재중이다. 아내는 생리학적 가임기간에 있으나 노산의 기준점에 걸려 있으며 현재 31주, 만삭이다. 복중 아이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란다. 그런데 문제는 아내의 약한 몸 상태다. 배가 뭉치고 돌처럼 단단해지기를 숱해 반복되는 현상이 최근 빈번하게 일어났다. 큰일이야 있겠냐는 마음과 두 번의 출산경험이 그럴 수도 있다는 안이함을 키웠다.
금요일 오후 아내는 정기검진차 병원에 들렀다. 요사이 일어난 변화에 대해 무덤하게 던진 말이 담당의사의 입을 통해 당장 입원하라는 급박함으로 돌아왔다. 심전도결과 부정맥이 간헐적으로 보이고 자궁이 미세하게 열린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고 당장 출산을 한다든지 수술을 하여야 할 정도는 아니라 황망함 속에 다행이다. 아내는 그래도 꿋꿋하게 내게 전화를 걸어온다. 수화기 저 편 너머를 통해 흘러오는 차분한 음성이 전광판의 광고처럼 한 자 한 자 휙휙 빠르게 흐른다.
아내는 아이들과 내 걱정이 우선이다. 복중태아도 소중하겠지만 아내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말문이 막힌다. 별 일 아니라는 말도 입원하면 홀로 있을 가족들은 어떻게 하냐는 그 말도 누군가의 애석한 기별처럼 꺼끌거린다. 나는 아내가 여자이기 이전에 어미임을 망각했다. 어미의 넉넉하고 넓은 모성의 본질을 잊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싫다. 뭐라고 말을 넘겨주기도 전에 걱정의 실체를 만들어 올리는 아내의 생각이 못 마땅하기 때문이다.
겨를도 없이 버럭 내 지른 까칠한 말에 아내도 나도 당황했다. 이내 후회가 태산처럼 밀려든다. 그렇게 아내는 입원했다. 주말 내 병원에 들러 아내를 위로한 후 두 아이와 아내가 없는 휑뎅그렁한 집을 지켰다. 철부지 아이들에게도 아내의 부재는 컸다. 떼를 쓸 상황, 고집을 부릴 상황에서 아이들은 눈망울을 굴리며 제 어미를 먼저 떠올리는 눈치다. 고맙고 또 고맙다. 언제 이만큼 훌쩍 자라버렸는지 아이들의 생각꼭지에 대견해진다. 무엇보다 아내의 빈자리가 얼마 만큼인지를 가족들은 제 각각 깨달았다. 아름드리나무처럼 쉴 자리를 만들어주고 곰살맞게 중심을 잡아 주던 아내의 자리를 말이다.
안해가 집 안의 해에 비유한 그 말을 어렴풋하게나마 공감이 간다. 투닥투닥 사소한 일로 서로의 속을 상하게 하고 오기를 부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별 일 아닌 일에 웬 호들갑이냐는 주책이겠으나 무사귀환을 소망한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