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 한국의 석학 시리즈 2
강정인 지음 / 아카넷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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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치사상과 한국의 정치사상을 연구해온 저자의 역작이다. 먼저 이론적 틀을 분류하자면, 저자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의 정치사상을 보수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급진주의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한국 현대 정치사상의 특징으로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민족주의의 신성화를 지적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서구에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확립된 보수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급진주의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에 완성된 형태로 유입되어 일종의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다루어졌다는 지적이다. 민족주의의 신성화는 민족주의가 보수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원천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지상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이러한 특징은 여러 문제를 야기했는데, "정치적으로 귀감이 될 '용기 있는 보수주의자', '원칙적인 자유주의자', '균형감각을 갖춘 민족주의자', '대중성과 급진성을 겸비한 사회(민주)주의자를 찾기는 민주화 이전은 물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힘들어 보인다"(117)고 지적한다.

이러한 틀에서 저자는 박정희의 저서와 연설문 등을 분석하여, 박정희 정치사상의 실체를 밝혀낸다. 일단 급진주의(좌파)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탄압하는 반공주의를 내세웠는데, 이 반공주의는 경우에 따라서 민주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와 동일시되었다. 박정희는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통치 상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지만, 실태와는 상당히 괴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그 필요성과 정당성을 인정했지만, 군정기의 행정적 민주주의, 3공 시기의 민족적 민주주의, 유신시대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수식어를 통해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민족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반공과 근대화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다. 박정희의 정치사상은 보수주의적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근대화 보수주의라고 하는 박정희의 보수주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한국의 특징을 드러낸다. 버크가 시조로 알려진 서구의 보수주의는 근대화에 대한 반동으로 전통으로 회귀를 내세우는 반면, 한국은 근대화라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의 회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진보주의와 유사한 측면을 보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구 정치사상의 발전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그 외의 다른 형태의 발전에 대해 특수성을 강조하는 관점을 서구중심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해방부터 분단, 전쟁, 독재, 민주화, 경제성장, 세계화와 정보화 등의 여정을 겪은 한국의 경험은 그 자체로 특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나라들(특히 비서구 세계)이 고유의 특수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한국의 정치사상을 발견하려는 시도로 박정희의 정치사상에 주목한 저자의 관점은 아주 적절한 것 같다. 18년간의 통치기간 동안 박정희는 다른 어느 정치지도자보다도 명확한 궤적을 보였고,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자, 박근혜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 해다. 이 시점에서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그 영향을 평가한 이 책을 다시 읽을 가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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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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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표백>, <댓글부대> 등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장강명은 최근 데뷔한 신예 작가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다. 장강명은 전업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동아일보에서 11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데, 그의 소설에 드러나는 소재들(<열광 금지, 에바로드>의 오타쿠, <한국이 싫어서>의 해외 이민, <우리의 소원은 전쟁>의 북한문제, <댓글부대>의 댓글부대)이 다분히 저널리즘의 관심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댓글부대>는 저자의 저널리스트 출신으로서의 문제 제기와 취재력이 좋은 의미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소설이다. 2012년 대선에서 드러난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부대, 여론조작 사건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거기서 영감을 얻은 저자는 댓글부대의 대규모 여론조작을 그린 이 소설을 썼다. 인터넷 생태계와 유흥업소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이 소설에 리얼리티를 불어넣으며, 현실 속에 있었던 사건들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저자의 후기에 이르러 이 소설은 완전한 허구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 속에 묘사된 인터넷 세계는 복마전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을 쓰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페이스북, 트위터, 일베, 오늘의유머, 포탈뉴스 댓글, 블로그 등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글들이 어쩌면 특정한 의도를 가진 어떤 세력에 의한 개입과 조작의 결과일 수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많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트루스>를 연상시키는 반전이 감춰져 있다. 이 충격적인 반전을 보면,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로 인해 의심과 불신이 인터넷을 지배하게 된 결과, 인터넷의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은 붕괴하게 되고, 그 또한 어떤 세력의 의도한 결과라는 것이 이 소설이 암시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 삼중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인터넷이든 언론이든 접하게 되는 모든 정보에 대해 맹신하는 대신 두 번 세 번 의심하고, 돌다리를 두드린 다음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맹신도, 무조건적인 불신도 아닌 합리적 비판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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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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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70-80년대를 배경으로 안재욱, 남상미가 주연한 드라마 <빛과 그림자>가 방영되었다. 박정희 시대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1972년의 유신헌법 선포 이후의 시대는 그림자가 한층 더 짙었던 시대였다. 5.16쿠데타는 ‘구국의 결단’으로 옹호하는 사람도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1971년에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예상 외의 선전을 하며 박정희에게 위협을 끼쳤다. 3선 개헌을 한 박정희 정권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가운데,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된다. 이때 박정희는 선거 유세에서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39)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듬해 10월, 대통령 직선제를 폐기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선포함으로써 이때의 연설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당시 형법 91조는 국헌문란의 정의를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429)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즉, 유신헌법 선포는 박정희의 또 한 번의 쿠데타였던 셈이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헌법을 유린하고, 인혁당사건을 조작하여 사형 선고 후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하고,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하고,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형욱을 납치 살해하는 등, 철저한 반대파 탄압과 독재체제 공고화에 나선다. 학교와 언론사에 경찰과 정보기관이 상주하고 있었고, 군대에서는 비전투손실로 매년 천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현재의 약 10배 가량).

 

 

이 책은 10월유신부터 10.26, 5.18까지의 시기에 대해, 당시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부터 포크송, 기지촌, 통일벼, 원자력발전 같은 사회문화사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듯하다. 저자는 2012년, 유신 40주년과 대선을 맞아 <한겨레>에 책의 내용을 연재했다. 일종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쓰인 책인데(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박근혜의 당선이었다.


 

유신시대 후반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유신공주” 박근혜가 어떻게 대통령으로(그것도 역대 최다득표 기록을 갱신하며) 당선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이 박정희시대의 그림자를 몰라서? 박근혜에 투표한 세대는 박정희 세대를 경험한 50대 이상이 더 많았다고 하니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첫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박정희시대의 빛이 그림자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되었던 것이 아닐까? 둘째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빛은 고스란히 계승하면서, 그림자를 희석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박근혜의 측근에서 비판자로 돌아선 전여옥이 최근 박근혜를 "육영수의 탈을 쓴 박정희였다"고 비판하며 배신감을 토로했는데, 이 말은 박정희에 대한 애증이 어떻게 박근혜 지지로 이어졌는지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는 대선 당시만 해도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사과하는 태도를 보였고, 경제민주화 등의 전향적인 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면에 반박근혜 진영은 다카기 마사오니, 유신의 부활이니 하는 얘기만 물고 늘어졌으니 평범한 유권자들에게 어느 쪽이 더 과거에 얽매인 인물로 보였을지는 뻔하다.

 

 

지난 대선까지만 해도 박근혜가 당선된다고 해서, 설마 유신헌법을 기초했다는 김기춘이 비서실장이 되고,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새마을운동을 홍보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되돌리고, 여당 원내대표도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찍어내는 등의 퇴행적 행보를 할 줄은 몰랐던 유권자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물론 이럴 줄 몰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선견지명을 남겼으니 말이다.


 

20대 초반의 박근혜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며 유신정권의 퍼스트레이디로서 박정희의 지근거리에서 정치를 배웠다. 18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집권한 박정희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하필 박근혜가 보고 배운 박정희는 집권 말기의,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13)


 

[박근혜가:인용자] 영남학원이나 육영재단 정도 규모를 운영할 때에도 측근들이 어마어마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몰랐다면(알아도 방치했다면 더 큰 문제다) 과연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서 측근들의 부정부패가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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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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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제목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2015년에 출간되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한국이 싫어서> 또한 제목이 가진 임팩트가 가장 중요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무렵부터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꿈도 희망도 없다는 담론이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제목 그대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한 1인칭 화자 주인공 '계나'의 이야기는 그러한 '헬조선' 담론의 맥락에서 한국사회의 절망을 반영한 소설로 주목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재인이 뻐기면서 "한국에서는 아직 목소리 큰 게 통해. 돈 없고 빽 없는 애들은 악이라도 써야 되는 거야."라고 하더라. 하, 정말 그런 거야? (중략)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악다구니도 못 쓰는 사람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182)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악다구니도 못 쓰는' 사람으로서 이 소설이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에는 공감이 되었다. 솔직담백하다 못해 위악적이기까지 한 계나의 거침없는 내레이션은 술술 재미있게 잘 읽힌다. 호주 이민의 소소한 에피소드들과 성공담은 읽으면서 흥미롭기도 했다.

그런데 다소 새삼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일제시대부터, 아니 구한말부터 (헬)조선에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은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으로, 해방 후에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한국 교민은 있다.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 등 생활수준이 좋은 영어권 국가로의 이민도 상당한 규모에 이른지 오래다. 굳이 새로운 점을 발견하자면, 이전 시대의 이민들은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타향살이를 버텨냈다면, 소설의 계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버리고 호주행을 기쁘게 선택했다는 점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과거에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도 한국이 너무너무 싫었을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최인훈의 <광장>에는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된 주인공이 남한도 북한도 싫다며 중립국 인도로 가는 길을 선택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남한에도 북한에도 소속되지 못한 주인공은 중립국을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배제된다는 점이다.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주인공은 원리원칙을 고수하다가 같은 중립국행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왕따를 당한다. 결국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주인공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아마 인도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주인공은 그토록 원했던 중립국에서도 배척당했으리라. <광장>의 주인공에게 중립국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유토피아였겠지만,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 뿐이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광장>의 주인공은 어디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한 절대적 이방인이 아니었을까? 어쩌다 보니 <한국이 싫어서>가 2016년에 읽은 마지막 책이 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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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호드의 탄생 제우미디어 게임 원작 시리즈
크리스티 골든 &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지음, 김수아 옮김 / 제우미디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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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R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창조한 가공의 종족 오크(Orc)는 이후, 수많은 판타지 소설과 게임에서 대표적인 악역 몬스터로 기능해 왔다.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실시간 전략게임 워크래프트 1편(1994)과 2편(1995)에서도 마찬가지로 오크는 평화롭던 인간들의 세계, ‘아제로스’에 침략한 괴물들로 그려졌다.


2002년 발매된 워크래프트 3편은 오크의 족장 ‘스랄’을 주인공으로 하며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된다. 오크를 단순히 악역 몬스터가 아니라 나름의 정의를 추구하는 종족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후, 워크래프트 시리즈가 실시간전략게임에서 MMORPG로 변모하면서 오크는 워크래프트-WOW 시리즈를 대표하는 종족으로 발돋움했다.


<호드의 탄생>은 그러한 워크래프트 세계관 속의 오크 종족의 역사에 대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드레노어’라는 행성에서 거주하던 오크족이 악마에 의해 타락하여 같은 행성에 거주하던 종족 ‘드레나이’를 학살하고 ‘아제로스’를 침략하게 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간접적 화자인 ‘스랄’은 과거에 잘못된 길에 빠져 피의 살육을 벌였던 오크 종족의 과오를 참회하며 종족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되짚는다.


‘스랄’의 입을 빌려 저자는 소설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나와 동시대를 살면서 이 역사가 소멸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역사가 조용히 망각 속으로 가라앉게 내버려두자. 시간의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호수의 표면이 잠잠해지면, 누구도 심연에 도사린 수치심을 모르리라.(중략)


그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는지를 잊는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그런 일이 없었던 척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는 데 한몫했다는 걸 인정하는 대신, 우리를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오크는 이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늦기 전에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한다.(중략)


그래서 우리 종족이 절멸을 향해 한 발, 또 한 발 내디디며 나아갈 당시 그 길을 걸어간 이들의 증언을 듣고자 한다. 우리가 왜 그 길로 나아갔는지를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 길이 타당하고 선하며 올바른 것처럼 여겼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 (140,141)


이 대목을 읽으며 이 소설이 게임 속의 허구의 사건을 그리고 있음과 동시에, 나치스나 군국주의 일본 등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쓰여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몬스터였던 오크들마저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면, 하물며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소설 외적인 부분에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호드의 탄생> 원서는 2006년에 쓰여졌는데, 20년 넘게 이어져 온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도중에 몇 번이나 설정이 변경되었다. 올해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이 영화화되면서 그 프리퀄로서 <듀로탄>이라는 소설이 발매되었는데, 내용상 <호드의 탄생>과 겹치면서도 업데이트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도 <듀로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왜 굳이 10년 전의 <호드의 탄생>이 지금 와서야 번역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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