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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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1985년 데뷔한 이래로 다작한 작가인데, 한국에는 갈릴레오 시리즈 등의 최근 작품부터 데뷔작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식의 순서대로 번역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서 1995년에 출간된 <천공의 벌>은 한국에서는 작년에 출간되었다.

<천공의 벌>이 최근 다시 읽힐 이유가 있다면, 이 소설이 원전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위대 자동조종 군용헬기를 원격조종으로 납치해 원전 바로 위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범인은 메일을 통해 즉시 일본 전역의 원전을 정지하지 않으면 헬기를 추락시키겠다고 협박한다. 게다가 우연히도 헬기 안에 어린아이가 실수로 들어간 채로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본 전역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원전사고에 대해서는 체르노빌과 같은 휴먼 에러(human error)나 후쿠시마와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서만 상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원전에 대한 테러를 시나리오로 삼고 있다.

저자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사카부립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해 엔지니어로 일하다 작가로 데뷔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이과적인 요소도 많이 들어가 있는데, 원자력기술에 대해서도 소설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들이 원전 주변 주민들이나 원전 관계자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원전에 대한 찬성, 반대 양론을 드러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을 복화술 인형 삼아 주장을 펼치게 만드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원전 문제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소설의 분량 자체가 600페이지가 넘다보니 전체적으로 소설이 너무 루즈하다. 탐정이나 형사가 범인과의 치열한 두뇌싸움 끝에 범인을 잡는 것도 아니고, 추리소설 특유의 반전도 없다보니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부족한 편이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 <판도라>라는 원전사고를 다룬 재난블록버스터 영화가 개봉되었다. 하지만 원전사고를 엔터테인먼트로 다루는 데는 난점이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처럼 방사성 물질 유출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기 어려워 재난 스펙터클의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공의 벌>은 원전사고 그 자체보다는 헬기 납치라는 스펙터클을 통해 서스펜스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사건만으로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진행시키기에는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을 통해 원전문제를 접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입문서가 될 수 있겠지만, 스릴러 소설 자체로는 밋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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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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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대선 사전투표를 하러 갔다. 사표(死票)는 없으니 소신껏 투표하자는 것이 평소 지론었지만, 막상 15명(사퇴한 두 명을 포함)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보자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 두세 명 중에서 그나마 덜 최악인 후보에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양자구도였던 지난 대선과 달리 이번 대선에는 의석 수가 5개 이상인 당의 후보만 다섯 명이었다. 그러다보니 최악을 피하기 위한 사표심리를 자극한, '홍찍문'이니 '안찍홍'이니 '심찍홍'이니 하는 상대 후보 비판이 난무했다. 유권자들은 항상 사표를 막기 위해서 차악에 투표하거나 사표가 될 것을 각오하고 소신투표를 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로 인해 소수정당들은 후보단일화를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종용당하기도 한다.

이럴 때면 대선에 결선투표를 도입하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대선과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대선이 있었는데, 39세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당선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채용하고 있는 바, 이번 대선에서는 극우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과 중도신당인 앙마르슈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진출했었다. 이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전통적인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는 공화당과 사회당의 후보가 결선투표에 낙선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트럼프와 샌더스 현상에서 나타나듯이, 전통적 우파정당과 좌파정당의 몰락과 극우, 극좌 세력의 약진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대선을 보면서 이러한 상황을 '예언(?)'한 소설이 떠오른다. 미셸 우엘벡이 2015년 출간하여 큰 화제를 모은 <복종>이다. <복종>은 2022년 대선에서 국민전선과 이슬람박애당(가공의 정당으로 보인다)의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자, 극우정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좌우가 합작하여 이슬람박애당의 대통령이 당선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소설의 배경인 2022년보다 5년 먼저 실현되었다. 현실세계에서 결선투표에 진출한 앙마르슈는 소설 속의 이슬람박애당과 마찬가지로 기존 정당의 좌우대립에서 벗어난 신생정당인 것이다.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과 신생 정당의 대중적 인기는 2010년대 들어서 서양 국가들을 강타하고 있는 현상이다.

소설 속에서 이슬람박애당의 집권은 소르본 대학의 이슬람화와 일부다처제 도입 등의 현상을 부르지만, 실업률 해결과 경제 기조 회복 등의 긍정적 효과를 낳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19세기말 프랑스 소설가 위스망스를 연구하는 문학교수다.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이슬람박애당의 집권으로 인해 정치적 격동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그는 프랑스 사회의 다문화사회화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며 유럽 문명의 쇠락(衰落)에 우울해하는 백인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럽 문명의 쇠락은 주인공의 자아의 불안과 중첩되며 나아가 남성성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소설 주인공과 같은 제1세계 백인 중년 남성 지식인의 고뇌에 대해 한국의 독자가 감정이입하기는 쉽지 않다. 은연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 화자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편견이 드러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이슬람박애당의 집권 이후 일부다처제나 여성의 히잡 착용이 사회에 지배적이 되는 상황이 그려지게 된다. 트럼프 당선이나 브렉시트 (Brexit)같은 충격적인 결과는 그러한 징후(徵候)라고 할 수 있겠다. 멀지 않은 미래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을 소설화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위스망스를 비롯한 프랑스문학에 대해 조예가 있었다면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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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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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라는 제목이 흥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책의 프랑스어 원제는 <여름의 사계절>이라는 뜻이고 <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는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1999년 7월 14일(혁명기념일)에 프랑스 북부의 휴양지 투케 해변을 찾은 네 명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웃집 소녀와 '썸'을 타고 있는 소년, 남편과 헤어지고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30대 여성, 자식들이 성장한 후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50대 여성, 평생에 걸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함께 보내고 생을 마무리하려는 70대 노부부. 이들이 각각 인생의 사계절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랑스어 원제가 <여름의 사계절>인 이유다.

같은 시공간에 모인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교차시켜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는 하다. 프랑스의 역사를 각 등장인물들의 삶에 투영함으로써 세대에 걸쳐 이어지면서도, 시간을 초월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각각 다른 챕터에 나온 등장인물들의 연결고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 읽고 나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동이나 감명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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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아의 반란
유민석 지음 / 봄알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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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의 등장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미러링'을 통해 여성혐오(misogyny)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일베의 말투를 흉내낸 메갈리아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화두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디씨에서 파생되었고, 일베의 말투를 흉내내며, 오유와 적대관계에 있고, 여시로부터 '여자 일베' 낙인을 이어받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의 악명을 모두 합친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악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일부 논자들로부터 메갈리아의 지향성이나 성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면서 메갈리아는 그야말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메갈리아의 반란>은 그러한 '메갈' 옹호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메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과도하게 악마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함은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혐오발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메갈의 긍정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메갈리아의 반란>은 그동안 몰랐던 메갈의 또다른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여러 의문점이 사라지지 않았고, 메갈리아의 미러링이라는 방식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부적인 논점들을 다루기 전에 전체적인 인상을 말하자면, 저자는 메갈리아 내부에서 생성되는 담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포괄적인 분석을 하고 있지만, 메갈리아의 담론이 외부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메타(meta) 담론 차원의 분석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에서는 여성혐오를 둘러싼 논쟁이 가시화,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논쟁의 장에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 혹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 조금더 고찰해 보았더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남성혐오는 혐오발언이 아닌가?

저자는 메갈리아의 '남성혐오' 또한 '여성혐오'와 마찬가지로 지양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저자는 마쓰다와 제니퍼 혼스비의 혐오발언의 정의를 들어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 두 정의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마쓰다는 "역사적 억압"에 방점을 두고 있는 반면, 혼스비는 역사적 억압의 유무로 혐오발언을 정의하지는 않고 있다.(77,78)

아무튼 마쓰다의 정의에 따르면 남성은 역사적으로 억압된 집단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혐오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설사 남성혐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성혐오와 같다고 기계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젠더 권력의 비대칭으로 인해 여성혐오와 남성혐오가 그 강도와 번위 면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폐한다(78, 79)"는 지적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일관계 및 일본의 혐한 시위에 관심이 있는 나는 이 이야기를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입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 억압의 유무를 혐오발언 성립의 중요한 요건으로 보는 저자(및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마쓰다)의 정의에 따르면, 일본인이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욕하는 것은 혐오발언이지만, 한국인이 일본인을 "쪽바리"라고 욕하는 것은 혐오발언이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정의에 따르면 혐오발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발언이 덜 유해하다거나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대한 '미러링'으로 '쪽바리 죽이자'는 시위를 한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재특회는 한국의 반일 시위를 예로 들며 '이것 봐라, 한국의 조센징들은 이렇게 일본인들을 모욕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되겠느냐!'고 선동할 것이고,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던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들도 재특회의 대의명분에 대해 공감, 내지는 동조하거나 최소한 '둘 다 똑같은 놈들이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재특회의 세력만 성장하게 될 것이다.(실제로 재특회 회원들 중 상당수는 한국의 반일감정에 대한 반발로 혐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도 반일 시위에서 일장기를 태우는 등의 퍼포먼스를 하는데 혐한 시위가 왜 문제냐는 반응을 보인다.) "조센징"이라는 혐오발언에 대항하기 위해 "쪽바리"라는 혐오발언을 꺼내든다면,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모욕은 나쁘다'는 보편적 도덕 규범에 대해 호소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한국의 온라인에서도 계속되는 무의미한 논쟁의 패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는 여성혐오가 남성혐오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메갈과 워마드의 패륜적 언행 이후로 '여혐이나 남혐이나 둘 다 나쁘다'는 식의 물타기 담론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메갈이나 워마드에 대한 과장된 악마화 탓도 있겠지만, '미러링'이라는 전략이 빌미를 제공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즉,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남성혐오'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혐오주의자들에게 절호의 알리바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반란적 발화"라는 의미에서 메갈리아의 미러링과 1955년 흑인 인권운동의 도화선이 된 로자 파크스의 불복종 운동을 동일한 선상에서 논하고 있다(65, 66). 이러한 비교는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로자 파크스는 흑인이 버스에 타면 백인은 흑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2008년 미국 대선에서 "God Damn America"란 설교로 물의를 빚은 흑인 목사 제레미아 라이트와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혐오발언의 '사용'과 '언급'은 구분되는가?

메갈리아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혐오발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베의 혐오발언과 메갈리아의 혐오발언에 대한 미러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메갈리안이 하고 있는 미러링 스피치는 혐오발언의 '사용'이라기보다는 과거의 혐오발언에 대한 '언급'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혐오발언을 사용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여성혐오발언을 언급해 보여주고 전시하는 방식에 해당한다. (74)

그러면서 저자는 "미러링이라는 사본을 원본 혐오발언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용과 언급을 구분하고 있지 못한 것'에 해당된다"(76)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발언의 '사용'과 '언급'이 구분되는 문제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저자가 '사용'과 '언급'의 구분을 설명하며 인용하는 주디스 버틀러는 "상처를 주는 말의 미학적인 재연은 그 말을 사용함과 동시에 언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75)고 말하는데, 이는 '사용'과 '언급'이 동시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다시 말해서 어떤 발언에 내포된 '사용'과 '언급'이라는 두 측면이 칼로 무 자르듯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론적 차원을 벗어나 현실세계에서는 이 두 구분은 더더욱 구분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혐오발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혐오발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일일이 주석을 달지 않는다면 고도로 문맥 의존적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메갈리아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좆린이 따먹고 싶다"는 게시물을 보자. 이 글의 작성자는 자신이 일베나 소라넷 등지에서 본 "로린이 따먹고 싶다"는 글의 미러링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문제는 모든 인터넷 사용자들이 일베와 소라넷에 올라오는 모든 글을 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좆린이 따먹고 싶다"는 글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혐오발언의 사용인지 언급인지에 대해 알 수 없을 수 있다.

선의를 가진 독자라면 '로린이 따먹고 싶다는 원본을 모르더라도, 이 글이 일베나 소라넷의 미러링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지만, 인터넷에서는 어떤 글을 접할 때, 선의보다는 악의나 무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더 많다. 메갈리아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메갈=좆린이"라고 결론내릴 것이고, 악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페미니즘 운운하더니 일베나 소라넷이랑 다를 바 없네'라고 왜곡할 것이다. 인터넷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특히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목표로 한다면- 선의보다는 악의를 전제로 하여 임하는 편이 불필요한 오해나 왜곡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참고로 나는 이 글을 최대한 선의에 입각하여, 메갈에 대한 비판이 '오해'나 '왜곡'일 가능성을 전제로 쓰고 있다.) 옛말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찰떡 같이 못 알아들었다고 해도 못 알아들은 사람이 잘못은 아닌 것이다.

방관은 동조인가?

메갈리아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룬 <혐오의 미러링>의 저자 박가분은 메갈리아의 '미러링'에 "난반사의 미러링"이라고 표현한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처럼, 메갈리아의 공격적인 언사가 엉뚱한 대상을 향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혐오발화의 내용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간에 (중략) 혐오발화자에게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경우 화자는 어떤 묵인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방관 자체가 혐오를 강화하며, 결과적으로 그 혐오에 일정 부분 공모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97)

이러한 문제의식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재특회의 경우를 보자면, 일본인의 대다수는 재특회의 혐오발언에 대해 동조하지 않지만, 묵인과 방조를 통해 재특회가 혐오발언을 할 여지를 주고 있다는 지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특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너희도 재특회랑 다를 바 없는 쪽바리 새끼들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 쪽바리 소리를 들은 일본인에게 감정적 반발을 불러일으켜 재특회에게 동조할 수 있게끔 만드는 효과 외에 말이다. '침묵하는 다수'를 침묵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한다면, 오히려 혐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지는 않을까? 나를 비롯해 메갈리아가 더 큰 혐오를 낳을 것을 우려하는 이들은 그러한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태극기집회에 다녀온 할아버지가 지하철에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는 젊은이를 향해 "그거 다 빨갱이 새끼들이 하는 짓이야"라고 외치고 다니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런 상황에서 "할아버지, 세월호 리본 단다고 빨갱이는 아니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바로 앞에서 반론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마이트라에 따르면, 그 상황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은 그 노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권위를 승인하고, 나아가 공모하게 된다. 그러한 관점은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메갈리아의 몰락과 그 후

이 책에서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메갈리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메갈리아라는 사이트 자체는 망한지 오래라는 사실 말이다. 메갈리아 사이트 자체는 2016년부터 '워마드' 등의 사이트로 분화되었고, 한때 악명을 떨쳤던 메갈리아는 없다. 대중의 광범위한 공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과격성 자체를 추구하게 된 운동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분열해가는 과정은 일본의 1970년대 신좌익 운동이 걸었던 길과 같다.

메갈리아 내에서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비하 논란으로 분화된 사이트 '워마드'는 남성 동성애자를 비롯한 남성 일반에 대한 모욕과 조롱을 더욱 과격화시키며, 전태일이나 백남기,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사망자 등을 모욕한 일로 지탄을 받았다. 한편 '메갈리아 4'라는 페이스북 사이트는 '메갈리아'라는 이름과는 달리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문제에 대해 이성적으로 지적하면서도 미러링이나 조롱, 모욕 등을 주로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조용한 분노가 더 효과적인 법이다. '메갈리아'가 처음부터 '메갈리아4'처럼 조롱과 모욕 대신 이성적 문제제기를 했다면, "너 메갈이지?"라는 불필요한 논쟁 없이 보다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페미니즘을 이끌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메갈리아를 비롯한 페미니즘 진영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논객 노정태는 위안부 소녀상 문제에 관해 "피해자라고 해서 무슨 일을 해도 허용되는 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위안부 소녀상 설치가 "무슨 일"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피해자라고 해서 무슨 일을 해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진술 자체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의 정당성 자체가 타자에 대한 무분별한 모욕과 조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조지 레이코프는 진보주의자들에게 보수주의자들과의 토론에서 가져야 할 자세로 다음과 같은 덕목들을 열거한다. 이 중 일부는 페미니즘 진영이 꼭 경청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에 적어두기로 한다.

여러분이 응대하는 보수주의자에게 반드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라. 상대방에게 존중을 표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라. 그들의 말에 단 한 마디도 동의할 수 없더라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대하라. 비열한 언행을 삼가라. 그쪽에서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악을 악으로 갚아봤자 좋을 것이 없다. 어쨌든 상대방을 존중하고 다른 뺨도 돌려대라. 여기에는 만다른 품성과 긍지가 필요하다. 품성과 긍지를 보여주어라.


소리 지르면서 싸우지 마라. (중략) 토론이 예의를 갖추기 시작하면 우리가 이긴다. 우리를 소리 지르게 만들면 그들이 이긴다.


하지만 정당한 분노는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정당한 분노는 품을 줄 알아야 하지만 표출은 절제된 방식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절제력을 잃으면 그들이 이긴다. (중략)


예의 바른 처신으로 강인함과 침착성과 통제력을 보여주어라. 논리적인 능력, 현실 감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기본적 사실에 대한 지식, (우월감이 아닌) 평등의 감각을 가져라. 최소한 당신에게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상대로서 당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상을 청중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조지 레이코프(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10주년 전면개정판> pp.27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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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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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마타 하리>는 제목 그대로 제1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간첩이었다는 혐의로 처형된 무희, 마타 하리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비교적 사실에 충실하게 마타 하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마타 하리가 억울한 희생양이었다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차라리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가 된 마타 하리의 스파이로서의 활약을 극적으로 각색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소재 자체는 흥미로운데, 이야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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