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 70-80년대를 배경으로 안재욱, 남상미가 주연한 드라마 <빛과 그림자>가 방영되었다. 박정희 시대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1972년의 유신헌법 선포 이후의 시대는 그림자가 한층 더 짙었던 시대였다. 5.16쿠데타는 ‘구국의 결단’으로 옹호하는 사람도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1971년에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예상 외의 선전을 하며 박정희에게 위협을 끼쳤다. 3선 개헌을 한 박정희 정권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가운데,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된다. 이때 박정희는 선거 유세에서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39)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듬해 10월, 대통령 직선제를 폐기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선포함으로써 이때의 연설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당시 형법 91조는 국헌문란의 정의를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429)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즉, 유신헌법 선포는 박정희의 또 한 번의 쿠데타였던 셈이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헌법을 유린하고, 인혁당사건을 조작하여 사형 선고 후 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하고, 일본에 있던 김대중을 납치하고,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형욱을 납치 살해하는 등, 철저한 반대파 탄압과 독재체제 공고화에 나선다. 학교와 언론사에 경찰과 정보기관이 상주하고 있었고, 군대에서는 비전투손실로 매년 천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현재의 약 10배 가량).

 

 

이 책은 10월유신부터 10.26, 5.18까지의 시기에 대해, 당시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부터 포크송, 기지촌, 통일벼, 원자력발전 같은 사회문화사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듯하다. 저자는 2012년, 유신 40주년과 대선을 맞아 <한겨레>에 책의 내용을 연재했다. 일종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쓰인 책인데(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박근혜의 당선이었다.


 

유신시대 후반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유신공주” 박근혜가 어떻게 대통령으로(그것도 역대 최다득표 기록을 갱신하며) 당선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이 박정희시대의 그림자를 몰라서? 박근혜에 투표한 세대는 박정희 세대를 경험한 50대 이상이 더 많았다고 하니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첫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박정희시대의 빛이 그림자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되었던 것이 아닐까? 둘째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빛은 고스란히 계승하면서, 그림자를 희석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박근혜의 측근에서 비판자로 돌아선 전여옥이 최근 박근혜를 "육영수의 탈을 쓴 박정희였다"고 비판하며 배신감을 토로했는데, 이 말은 박정희에 대한 애증이 어떻게 박근혜 지지로 이어졌는지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는 대선 당시만 해도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사과하는 태도를 보였고, 경제민주화 등의 전향적인 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면에 반박근혜 진영은 다카기 마사오니, 유신의 부활이니 하는 얘기만 물고 늘어졌으니 평범한 유권자들에게 어느 쪽이 더 과거에 얽매인 인물로 보였을지는 뻔하다.

 

 

지난 대선까지만 해도 박근혜가 당선된다고 해서, 설마 유신헌법을 기초했다는 김기춘이 비서실장이 되고,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새마을운동을 홍보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되돌리고, 여당 원내대표도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찍어내는 등의 퇴행적 행보를 할 줄은 몰랐던 유권자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물론 이럴 줄 몰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선견지명을 남겼으니 말이다.


 

20대 초반의 박근혜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며 유신정권의 퍼스트레이디로서 박정희의 지근거리에서 정치를 배웠다. 18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집권한 박정희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하필 박근혜가 보고 배운 박정희는 집권 말기의, 가장 나쁜 모습의 박정희였다. (13)


 

[박근혜가:인용자] 영남학원이나 육영재단 정도 규모를 운영할 때에도 측근들이 어마어마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몰랐다면(알아도 방치했다면 더 큰 문제다) 과연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서 측근들의 부정부패가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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