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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새해에 여러 계획이 있었지만 실제로 성공한 일은 거의 없다. 알라딘서재에서 12개월 동안 10권씩 추천도서를 선정했던 것은 그나마 올해에 있었던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올해 읽은 책들 중에서 좋았던 책 10권을 골라 보았다.(이하 책들의 순서는 랭킹이 아니다.)

 

1.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유벌 레빈(조미현)

 

 

프랑스혁명에 대해 영국과 미국의 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해석을 내렸다. 이후 200여년간 이들의 사상은 각각 보수와 진보를 형성하도록 발전해왔다. 잘 모르고 있던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에 대해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2. <분열된 제국> 콜린 우다드(정유진)

 

 

미국이 11개의 문화권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독립부터 현재까지의 미국사는 이들 문화권의 동맹과 각축을 통해 해설할 수 있다는 대담한 주장을 내놓은 책이다. 미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3.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 리처드 솅크먼(강순이)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지만, 안타깝게도 유권자들이 항상 바람직한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니다. 투표할 때마다 유권자들이 왜 어떻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미국의 사례에 대한 책이지만 한국에서도 충분히 통용되는 내용이다.

 

4. <낙엽이 지기 전에> 김정섭

 

 

종전 100주년을 맞이하는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 과정을 분석한 책이다. 제1차세계대전은 제2차세계대전처럼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전쟁이 아닌 각국 지도자들의 오판과 무능으로 인해 시작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의 교훈을 통해 전쟁과 평화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5.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최근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현상 중 하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이 책은 서촌, 종로, 한남동, 창신동 등 서울의 여러 동네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울이 고향인 나도 몰랐던 발전과 개발의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6. <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이난아)

 

<내 이름은 빨강> 등으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최신작이다. 이스탄불 시내에서 거리 장사를 하는 메블루트라는 인물을 통해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터키 현대사를 그려내고 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고 극적인 사건은 별로 없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빠져들게 된다. 

 

7. <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최용준, 최세진, 정준호, 김세경)

 

 

 

SF작가 코니 윌리스의 단편소설집이다. 독특한 세계관을 짧고 위트있게 표현한 <리알토에서>, 역사에 대한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화재감시원>, 유쾌하고 통쾌한 <내부 소행> 등 수록작들이 모두 수작이라 만족스럽다.

 

8. <여수의 사랑> 한강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으로 화제가 된 한강 작가가 90년대 전반에 썼던 단편소설들을 모은 책이다. 읽으면서 지금과는 많이 다른 90년대 전반 한국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름다우면서도 여운을 남기며 인상적이다.

 

9.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최세희)

 

1960년대의 풋풋한 첫사랑을 기억하는 남자와 그에 대한 악몽을 가진 여자가 수십년 후 노인이 되어 만난다는 소설. 구성이나 문장도 좋지만, 영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느낄 수 있게 해 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결말이 인상적이다.

 

10. <남한산성> 김훈

 

 

<남한산성>은 올해 100쇄를 찍었다고 하고 영화화되기도 한 소설이다. 김훈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이 소설이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잘 쓰여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적 역사 속의 인간에 대해서 잘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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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알쓸신잡>이라는 예능 프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알고 보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의 준말이다. 원래는 <지대넓얕>,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원조다. 또 <닥끌오재>, '닥치고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라는 책도 나왔다. 최근의 트렌드는 잡학상식인 것 같다. 나도 잡학상식을 통해 심오한 고찰을 가능케 하는 책 10권을 뽑아 보았다.

 

1. <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정순분)

 

 

 

일본은 18세기까지도 육고기를 일반적으로 먹지 않았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 음식에 관해서도 서양식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일었고, 소고기와 돼지고기 음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돈가스는 서양의 문화를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대표적 음식이다. 돈가스의 탄생에 이르는 양식의 변화를 통해 일본의 근대를 조망한 점이 재미있다.

 

2. <대한민국 치킨전> 정은정

 

 

한국은 치킨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치킨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양념치킨부터 치맥, 조류독감과 프랜차이즈 등 치킨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치킨이라는 음식을 통해 한국사회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치킨이 먹고 싶어지는 건 덤이다.

 

3.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 야콥 블루메(김희상)

 

 

역시 치킨의 단짝은 맥주인 모양이다. 맥주의 역사, 역사 속의 맥주를 주제로 맥주로 유명한 나라 독일 사람이 쓴 책이다. 치킨 한 조각에도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녹아 있듯이, 맥주 한 잔에도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음을 새삼 알게 된다. 

 

4. <담바고 문화사> 안대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을 거쳐 전래된 담배는 그리 오래된 물건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조선 후기에는 '담바고'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유포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조선인들은 담바고를 어떻게 접하고 대해왔을까? 조선시대 담배에 대해 쓰인 글들을 통해 당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다.

 

5. <문구의 모험> 제임스 워드(김병화)

 

 

문방사우라는 말도 있지만, 글쓰는 사람들에게 책 못지 않게 문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필, 지우개, 볼펜, 만년필부터 스테이플러와 포스트잇까지 문구들이 겪어 온 모험들이 그려진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시대이기에 새삼 빛나는 아날로그 문구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6. <라디오체조의 탄생> 구로다 이사무(서재길)

 

 

얼마 전 예비군 훈련에서 오랜만에 국군도수체조를 했다. 한국에 국민체조가 있다면 일본에는 라디오체조가 있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라디오체조가 유입되어 유행하였고 그 명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파시즘과 전체주의와 함께 유행한 라디오체조는 신체와 시간의 규율화하는 대표적인 매체였다. 라디오체조를 통해 일본을 알 수 있어서 흥미로운 책이다.

 

7.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진중권

 

 

최근 한국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 중 하나는 반려동물, 그 중에서도 고양이의 인기가 아닐까 싶다. 논객으로 유명한 진중권이 고양이 기르는 즐거움에 푹 빠지더니 고양이의 역사, 문학, 철학에 대한 책을 썼다. 고양이는 언제부터 어떻게 길러졌으며,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비롯한 문학 작품들에서 고양이들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쇼펜하우어나 데리다는 고양이를 어떻게 그렸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책이다.

 

8.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손열음

 

 

클래식이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고상하다거나 어렵다는 이미지가 강한 것 같다.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칼럼니스트인 손열음이 쓴 이 책은 클래식에 대해 어려워하는 일반인이 입문하기에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클래식에 빠져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9. <김이나의 작사법> 김이나

 

 

나 역시 클래식보다는 대중가요, 특히 걸그룹 노래가 더 익숙하다. 현재 가장 유명한 작사가 김이나가 작사의 비법을 풀어놓은 책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요즘 노래는 가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선입견도 있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멜로디에 맞춰 서정적인 가사를 쓰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앞서 소개한 책들이 돈가스나 치맥을 먹으며 읽어야 할 책들이라면, 이 책은 유튜브를 켜 놓고 읽어야 할 책이라 할 수 있다.

 

10.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이경혁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게임비평 책이라 반갑다. 그 옛날 오락실 게임부터 스타크래프트, 문명, 워킹데드, 심시티, 마인크래프트, LOL 등 일세를 풍미한 게임들을 다룬다. 게임 속에 나타난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물론, 게임을 통해 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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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에 책장을 정리했다.

 

 

 

 

 

 

 

 

 

 

 

 

 

 

 

책장에 책들을 정리정돈해서 넣으니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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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관련 도서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러시아혁명은 소련이라는 전체주의 국가를 낳았고, 억압과 폭력으로 70여년을 버텼던 소련은 결국 1991년 붕괴하며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러시아혁명이 남긴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책 10권을 선정했다.

 

1. <러시아 혁명사 강의> 박노자

 

 

러시아혁명 그 자체를 다룬 책들 가운데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저자는 소련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하여 인기를 얻었던 박노자씨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남다른 관점이 기대된다. 

 

2. <실패한 제국> 블라디노프 주보크

 

 

러시아혁명 이후, 붕괴하기까지의 소련의 역사를 두 권에 걸쳐 다룬 책이다. 소련 전체의 역사서로서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깊이있게 읽을 수 있다.

 

3. <코뮤니스트> 로버트 서비스(김남섭)

 

 

 

마르크스부터 레닌, 마오쩌둥, 덩샤오핑,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역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룬 포괄적인 책이다. 물론 러시아혁명과 소련에 대한 내용 또한 책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 <동물농장> 조지 오웰(도정일)

 

 

전체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소설로 풀어낸 조지 오웰이 쓴 책이다. 인간들을 내쫓고 동물들만의 농장을 이루었지만, 이상향으로서의 동물농장 안에서 계층 구분과 폭력, 억압이 다시금 재현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알레고리로서 탁월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5.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영의)

 

 

소련은 체제에 반대하는 인물들, 아니 아무런 이유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소에 보내는 가혹한 생활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솔제니친이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쓴 <이반 데니소비치>는 냉전 중에 소련의 가혹한 현실을 고발하였다. 수용소라는 곳의 억압과 폭력의 생생한 기록이다.

 

6. <농담>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저자 체코의 밀란 쿤데라가 쓴 소설이다. 편지에 농담삼아 "트로츠키 만세"라고 썼다가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수형부대로 보내지며 인생을 망치게 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련뿐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탄압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읽어볼 만하다.

 

7. <차일드 44> 톰 롭 스미스(박산호)

 

 

소련의 스탈린 시대, 주인공 레오는 어린이들을 살해하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와 개인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소련 체제라는 두 가지 적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게 된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는 체제가 낳은 괴물을 통해 소련 체제의 폭압성을 그려낸 소설이다.(그러고 보니 영화 <VIP>랑 비슷한 듯?)

 

8.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송은주)

 

 

영국문학의 거장 줄리언 반스가 스탈린 정권 당시의 피아니스트 쇼스타코비치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제목처럼 시대와 예술, 체제와 개인의 이야기를 묵직하게 다루고 있다.

 

9. <세컨드 핸드 타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김하은)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며 페레스트로이카를 진행하자 소련의 보수파들은 쿠데타를 획책하고, 소련의 시민들이 여기에 저항하면서 마침내 소련이 붕괴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10년 후, 러시아 사람들은 소련 해체 이후의 빈부격차, 인플레, 체제 불안, 전쟁과 인종청소를 겪으며 차라리 소련 시절이 나았다고 회고하게 된다. 평범한 구소련 사람들의 인터뷰를 생생히 기록하면서 문학적 감동을 주는 걸작.

 

10. <러시안 다이어리> 안나 폴릿콥스카야(조준래)

 

 

소련은 무너졌지만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인 푸틴은 새로운 독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압적인 통치를 계속하고 있다. 푸틴 정권을 비판하다가 2006년 암살당한 저널리스트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그러한 러시아의 현재를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푸틴 당선 이후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과정을 기록한 이 책을 유작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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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개봉했다. 제목에 나타난 대로 살인자가 영화의 주인공(들)이며, 직접적인 살인사건의 묘사가 등장한다. 남성에 대한 살인 장면과 함께 여성에 대한 살인 장면 또한 반복적으로 나온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이 점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논조는 없는 것 같다. 앞서 개봉한 <V.I.P.>가 잔혹한 살인 묘사로 논란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살인자의 기억법>이 15세, <V.I.P.>가 청불인 만큼 두 작품의 수위에는 차이가 있다).

 

<V.I.P.>의 잔혹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여자 죽이는 영화"라고 요약한다. 이러한 요약은 세 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한 것 같다. 첫째로 <V.I.P.>에서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죽는다. 수적으로 보면 남자가 더 많이 죽는다. 둘째로 영화의 러닝타임 중에서 여성에 대한 살인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은 대략 2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정확히 재 본 것은 아니다). "여자 죽이는 영화"가 아니라 "여자 죽이는 사이코패스를 둘러싸고 경찰, 국정원, CIA, 북한 간첩이 암투를 벌이는 영화"가 보다 적절한 요약이 될 것이다. 셋째, 이 영화를 "여자 죽이는 영화"라고 요약한다면 <양들의 침묵>도, <살인의 추억>도, <블랙 달리아>도 "여자 죽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여자 시체" 역이 아홉 명이나 등장한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지만, 영화에서 시체로 나오는 여성은 두세 명, 말그대로 시체로서 스쳐가듯이 등장할 뿐이다. 영화의 여성 피해자 중에서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된 인물은 프롤로그의 여학생이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두고 "스너프 필름"과 다름없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이 장면이 관객의 성적 쾌감을 자극할 목적으로 찍힌 것이 아니라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폭력성을 나타낼 목적으로 찍힌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해당 장면은 에로스보다는 타나토스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물론 <V.I.P.>에서처럼 살해 장면(영화에서 강간 장면은 없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었냐는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보스턴에서 가톨릭 교회의 성추행 실화를 영화화한 <스포트라이트>가  실제 강간 장면을 넣지 않고도 묘사했다며 비교한다. 가톨릭 교회라는 추상적 구조와 싸우는 기자들을 그린 <스포트라이트>와 악마적 성격을 가진 사이코패스 살인마와의 대결을 그리는 <V.I.P.>는 장르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다를 수밖에 없다.

 

<V.I.P.>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어떤 관계자는 자기검열 때문에 "디즈니 영화나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잘못된 것이다. 디즈니 영화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많다. 그러나 전체관람가, 혹은 12세관람가 영화만이 좋은 영화인가라는 문제 제기는 유효할 것이다.

 

나는 <스포트라이트>, <더 테이블>, <원더우먼>, <아가씨>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영화가 그런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V.I.P.>가 좋은 영화인가 하면 그에 대해서는 개별적 작품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피해자 외에 여성 캐릭터가 전혀 없다는 부분은 "여성혐오"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은 작품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하나의 유용한 틀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치스가 "퇴폐 예술"을 분류했듯이, 소련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하는 반동 예술을 분류했듯이, 페미니즘 비평이 "여혐영화"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야말로 페미니즘의 왜소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도덕적 선악의 개념으로 해석되어 '올바른 영화'와 '틀린 영화'로 구분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V.I.P.>를 보고 잔혹한 장면에 혐오감을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집에서 지상파 TV를 보다가 채널을 돌려 우연히 보게 되는 아침드라마가 아니다.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다. 영화를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 관객이라면, 영화의 시놉시스는 1분만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영화와 관객의 미스매치가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는 <파이 이야기>를 보러 갔다가 호랑이가 동물들을 잡아먹는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극장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렇다고 <파이 이야기>가 나쁜 영화라는 의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P.S. 이른바 "별점테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욕을 하려면 보고 욕하고, 보지 않았으면 욕하지 마라"는 전통적 견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구나(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어떤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릴 자유가 있다. 물론 영화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감상평을 보고 비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비판을 보고 쓴 비판을 보고 쓴 비판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아무도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영화에 대한 비판만 무한히 재생산되는 건 문제다. 실제 영화를 본 관람객이 내린 평점과 일반인이 내린 평점을 따로 표시되는 추세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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