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서도 교양인이자 독서가로 유명한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지의 정원>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인생의 책 100권을 선정한 적이 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 조예가 깊은 다치바나 다카시답게 <2중나선>부터 시작하여 <만들어진 신> <성경><코란> <논리철학논고> <직업으로서의 정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리엘> <황무지>까지 동서고금의 명저들이 망라된 목록에서 나는 신기한 책 제목을 발견했다. 바로 99번째 책이 사노 요코의 동화 <100만 번 산 고양이>였던 것이다(참고로 100번째 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일본의 동화작가이자 에세이스트 사노 요코의 이름을 그렇게 알게 되었는데, 최근에는 한국에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라는 에세이가 번역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 알라딘신간평가단 에세이 분야에 사노 요코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가 선정되어 읽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16기 알라딘신간평가단에서 선정된 에세이들 중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와 더불어 가장 에세이다운 에세이였던 것 같다(아니, <세컨드 핸드 타임>이랑 <내 심장을 향해 쏴라>가 논픽션이지 어떻게 에세이란 말인가). 일상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서는 <라면의 끓이며>와 비슷하지만, 김훈이 글이 힘이 잔뜩 실린 에세이라면, 사노 요코의 이 책은 훨씬 가볍게 쓰인 느낌이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니, '뭘 그렇게 진지하게 살아?(Why so serious?) 어깨 힘 빼고 편하게 되는 대로 살아'라는 느낌이다. 투병 중에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세상을 떠난 사람답다고 해야 할까? 쿨하게 세상의 진지함을 특유의 힘 빠지는 유머 섞인 문체로 웃어넘긴다. 그런데도 그런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들에 인생의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런 류의 에세이에서 돋보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그리면서도 그 속에서 빛나는 인간 통찰의 깊이와 번뜩이는 재치다. "인쇄된 글로 된 것을 의심해라"라고 말하던 아버지, 아프면 "내가 죽으면 말이지"하고  앓는 소리를 하던 어머니, 일주일에 한 번 한 아름이나 되는 꽃을 사면서 남편에게는 구멍난 양말을 꿰매어 신게 하는 동생, <미운 오리 새끼>의 오리는 그냥 오리로 살면 안 되냐고 묻는 아들, 비정상적으로 짧은 다리와 긴 몸통이 처량해 보이는 애완견, 회사 중역 기요시와의 불륜을 끝낼지 말지 전화로 물어오는 친구 마리코, 술에 취하면 문의 매트를 0.1mm의 오차도 없이 직각으로 고쳐놓는 다미야 군 등등 저자 주변의 흥미로운 인간군상들의 묘사를 보면 꼭 좋은 일들만 가득하지는 않은 우리의 일상이 저자처럼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심심풀이로 읽기 때문에 활자는 그저 배경 음악처럼 흘러갈 뿐, 교양으로도 지성으로도 남지 않는다. 오락이니까 그냥 시간을 때우면 되는 거다. 내 안에 축적되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는 일 같은 건 없다. (중략)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 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속에서 꺄아 꺄아 기뻐하고 싶은 거다. (318-320)

 

저자는 이렇게 말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영화나 책에 대한 교양과 지성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노 요코의 이 책은 에세이로서는 꽤나 만족스러운 독서경험으로 생각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심장을 향해 쏴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좋은 점은 평소라면 안 읽었을 책, 놓치고 말았을 책들을 읽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달 신간평가단 선정도서가 도착했을 때, 먼저 든 생각은 "이번 달은 망했구나"였다.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는 그렇다 쳐도, <내 심장을 향해 쏴라>가 문제였다. 700페이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책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다. 내가 추천한 책도 아니고, 책 소개도 딱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장석주, 표창원 같은 사람들이 추천한 책이라니 좋은 책이겠지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700페이지라는 분량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잘 쓰인 추리소설과도 같았다. 아니, 어지간한 추리소설도 이 책의 빨려들어가는 듯한 흡인력은 따라오지 못한다.

 

이 책의 저자는 마이클 길모어, <롤링스톤>의 수석편집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물론 이 책이 음악평론 서적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게리 길모어의 막내동생으로서 썼다. 게리 길모어가 누구냐 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형수"라고 한다. 1976년, 그는 2명을 총으로 쏴 죽였는데, 아무 이유가 없는 묻지마살인이었다. 법정에서 자신을 사형에 처해달라고 한 그는 결국 사형당함으로써 10년간 시행되지 않던 유타주의 사형제도를 부활시켰다.

 

그의 소년원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뉴스를 통해 게리가 저지른 가엾은 돈키호테 같은 무모한 행적을 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로 달려가서 게리를 두 팔로 안고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볼까 하고 말입니다. '(중략) 이 자식들 체면 좀 살려주잔 말이야. 안 그러면 자넬 죽여버릴지도 몰라. 이번 한 번만 머리를 좀 숙여봐. 그들이 원하는 걸 줘버려.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그러면 되는 거야.' 나는 분명히, 만일 게리가 자기가 꺾을 수 없는 높은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했다면, 그들 마음속에는 게리를 살려줄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중략) 그때 내가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나는군요. '저놈의 유타 모르몬 교도들은 신이 항상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자기들이 신의 명령을 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어.'" (291, 292)

 

게리 길모어는 무고한 두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자신을 죽여달라며 기존의 도덕을 부정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는지도 모른다.

 

둘째 형 게리 길모어가 사형에 당하고, 어머니마저 죽자 막내동생 마이클 길모어는 자신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그 시작은 어머니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르몬교의 피의 역사부터 시작된다. 나는 모르몬교가 기독교의 일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1820년대 조셉 스미스라는 계시자가 <모르몬경>이라는 사이비 경전을 쓰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네피 족과 라만 족의 천년에 거친 전쟁이라고 하는 정통 성경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정부로부터 박해당하던 모르몬교도들은 유타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모르몬교 유타 이주의 역사를 따라오다보면 길모어 형제의 어머니 베시 길모어가 나타난다. 베시 길모어는 어렸을 적에 악령이 씌어 동생이 죽는 등 괴이한 일들을 겪는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베시는 프랭크 길모어와 결혼하여 집을 나간다. 그런데 베시보다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았던 프랭크 길모어는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니는 사기꾼에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쫓기고 있는 형편없는 인물이었다. 프랭크 길모어는 자신의 아버지가 미국의 전설적인 마술사 후디니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까지 게리 길모어 얘기는 안 나온다. 심지어 게리 길모어는 장남도 아니고 차남인지라 게리 길모어는 167페이지가 되어서야 태어난다.

 

지난 몇 년 동안,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 있다. 언제 어떻게 그 죄의 씨앗이 싹튼 것일까? 다르게 말하자면, 이 모든 잘못된 결과를 불러오는 원인이 된 시점을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중략) 그 역사의 어디쯤,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까? 내 형의 영혼을 살인으로부터 구출할 수도 있었던 시점은 어디였을까? 그 순간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파멸의 운명을 피할 순간을 찾아낸다면, 그 운명의 악순환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매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쁜 쪽으로 결정되고 있었다. 한 명의 살인자, 그의 지독하게 불행했던 삶의 행로를 바꾸려면, 한 순간이 아니라 과거의 매 순간을 새로운 고리로 연결해야만 했다. (172)

 

그렇게 게리는 정해진 운명대로 파멸의 길을 가게 된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아버지에게 매일같이 매질을 당하던 게리는 점점 비뚤어져 소년원에 가고 마약과 절도 등 범죄에 물들어간다. 결국 게리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었다.

 

다소 뻔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몰입감을 선사하는 책이다. 이 책은 나다니엘 호손(혹은 에드거 앨런 포나 커트 보네거트)의 계보에 속하는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평가해도 좋을 듯 싶다. 19세기 모르몬교도의 이야기부터 마술사 후디니나 인디언 악령의 전설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가정폭력과 살인자의 내면 심리로 파고 들어가는 수법이 인상적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위대한 개츠비> 등 미국소설의 걸작들을 일본어로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번역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라는 제목에서 내가 꽂힌 키워드는 '그들' '변경' '걸었다'일 것이다. 먼저 "그들"이란 유럽의 문화예술에 큰 족적을 남긴 거장들, 즉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안나 아흐마토바, 샤갈, 쇼팽, 괴테, 고흐, 토마스 만, 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이다. 유럽 문화에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눈이 확 뜨일 만한 이름들이다. "변경"은 유럽문명에서 상대적으로 변두리에 해당하는 러시아와 동유럽, 그리스 등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걸었다"에서 이 책이 여행기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주체인 저자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학 전공자라고 하니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유럽의 변경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러시아와 동유럽, 그리스는 말 그대로 변경에 해당하겠지만, 베를린이나 남프랑스, 베네치아는 어떤 의미에서도 변경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한 지리적 구분이 아니라 정신적 의미에서 변경인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무언가 석연치 않다. 차라리 러시아, 동유럽, 그리스, 서유럽 등 몇 개의 장으로 나누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유럽의 거장들의 족적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삶을 예쁜 사진들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인물이 둘 있다.


먼저 그동안 이름만 알고 있던 샤갈이다. 샤갈은 벨라루스의 비텝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이 사실부터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막연히 프랑스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후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파리로 망명하고,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나치스의 침략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남프랑스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 전전하며 살아야 했던 샤갈의 인생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노마드 예술가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또 한 사람은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빅토르 박이다.1922년 중국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연해주로 이주했고, 그 후 구소련,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에서 몇 년 전 작고할 때까지 평생을 살았다.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등의 풍경을 그린 화가로 이름을 날린 그는 "우즈베키스탄에 살았던 러시아 리얼리즘의 전통을 잇는 작가이며 운명적으로 한반도의 문화로부터 단절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191, 192)었다. 샤갈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노마드로서의 삶을 살아간 예술가였다.


그들은 중심이 아닌 변경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이었다. '그들'의 삶을 추적한 책이라 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들의 여정을 따라 나도 유럽의 변경을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갈등하는 동맹 - 한미관계 60년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엮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거수일투족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경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핵무장을 용인하겠다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한미 양국을 포함하여 동북아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는 뉴스를 들었다. 트럼프다운 과격하고도 파격적인 주장인데, 과연 헛소리로만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이승만정부부터 이명박정부까지의 한미동맹의 역사를 조망한 <갈등하는 동맹>을 읽다 보면,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감축 카드를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이 휴전한 이후, 미국은 한미동맹과 그에 따른 주한미군 주둔을 부담스럽게 느꼈다. 아이젠하워는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사령부에 귀속시켰다(24).


케네디정부와 존슨정부는 주한미군과 한국군을 감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43), 이에 반대한 박정희정부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5만의 한국군을 파병하였다. 한국군 파병은 주한미군 감축 논의를 일시적으로 중단시켰지만, 존슨에 뒤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결국 "한국군 현대화 지원을 조건으로 1971년 6월까지 주한미군 지상군 1개 사단의 병력 약 2만 명을 철수시켰다(75)." 이때 미국은 "박정희 정부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면서 주한미군 철수에 강력히 반발하고, 또 미국으로 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려고만 한다는"(75,76)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에 박정희 정부는 1968년 있었던 북한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 사건 등에 강한 위기감을 표하고 있었다.


인권문제를 유난히 중시했던 카터 대통령이 취임하자 한미갈등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카터 대통령은 대선에서 박정희 정부의 국내적 억압을 비판했다. 로비스트 박동선이 박정희 정부의 후원으로 미국의 국회의원들에게 뇌물을 공여한 '코리아게이트'가 발각되면서 미국 내 여론은 악화되었다. 카터는 1982년까지 한국에서 육군을 완전히 철수시키고, 공군과 해군만을 남겨둔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은 미국 국내에서도 반대여론에 봉착했고, 1979년 방한한 카터는 박정희와 정상회담을 가지고, 한국의 국방비 증액과 인권개선을 요구하는 것으로 주한미군 철수 논의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사건부터 부마사태에 이르기까지 카터 행정부는 "대사 소환, 대통령의 친서 전달, 공개적 비판, 원조 중단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박정희 정부에 압력을 가했(88)"고, 이는 간접적으로 10.26을 유발했다고 한다.


흔히 미국이 패권주의 때문에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고 이해하는데, 이승만-박정희 정부 시기의 한미동맹을 보면, 미국은 어떻게든 한국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반면, 한국은 미군을 한국에 붙들어매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여러 반미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미군의 한국 주둔은 결코 미국 입장에서 수지 맞는 장사도 아니었다. 한국전쟁에서 54000여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상식적으로 이러한 희생을 치르면서 미국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싶어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냉전이 끝나고, 한국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에 성공하면서 이러한 한미관계에 변화가 나타난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는 한국이 대북강경책을 주장하며, 북한의 위협을 지렛대로 삼아(전두환 시대 이후에는 시민사회의 반미감정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90년대에는 한국이 북한에 대해 온건해지고, 미국이 강경책을 선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김대중, 노무현과 부시정부 사이의 갈등이 바로 그러한 예라고 했다. 1990년대 중반 제1차 북핵위기 당시 김영삼 정부는 북한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했으나 막상 클린턴 정부가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서자 당황하여 서둘러 북핵위기를 봉합하려 했다.


이렇듯 한미동맹의 지난 역사는 박명림 교수의 말대로 "순응과 도전, 적응과 저항"을 거듭한 갈등속의 동맹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한미동맹에 또 한 번의 위기가 다가오려 하고 있다. 미국 대선 경선에서 예상치 못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두 후보, 공화당의 트럼프와 민주당의 샌더스는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아마추어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트럼프가 주한미군/주일미군 철수와 한국/일본의 핵무장을 주장한 것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트럼프와 샌더스가 보이고 있는 것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에서 보통국가로서의 미국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미관계의 전환점에서 어떻게 더욱 발전된 한미동맹을 향해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알라딘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된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먼저 <위대한 개츠비>를 먼저 읽어보기로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내게 별 감흥이 없었고, 그저 그런 소설로 기억되었다. 내심 왜 이 소설이 위대한 소설들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5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위대한 개츠비>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빠져들었고, 묘한 감동과 흥분에 휩싸여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말았다. "미국 문학의 180쪽짜리 시스티나 성당"(16)이라는 찬사가 과히 거짓은 아니라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몇 년 전 읽은 것과 같은 번역자의 같은 판본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같은 개츠비 연구서들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읽은 것도 아니었고, 내 인생에서 적어도 연애에 관련된 큰 변화는 없었는데 책을 읽은 감상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고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의 저자 모린 코리건은 "고등학교 시절 어쩔 수 없이 이 책을 읽으며 왜 위대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11)지만, 현재는 매년 대학 신입생들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강의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수강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면서 소설의 겹겹이 쌓인 의미를 더 잘 알아차리게 되었"(16)다고 한다. 고전, 혹은 위대한 명작들의 공통점이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위대한 개츠비>는 그 조건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나서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삶과 <위대한 개츠비>의 탄생비화, 소설 <개츠비>가 걸어온 궤적 등을 다루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지만, 부인이었던 젤다와 딸 스코티와의 관계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헤밍웨이와의 관계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에게 "당신의 간은 프린스턴 박물관에, 심장은 플라자 호텔에 뿌립시다"(46) 운운하는 편지를 썼다고 하니, 라이벌보다는 악플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개츠비> 안에 나타난 유대인이나 이민자의 문제, 1920년대 뉴욕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 <개츠비>의 하드보일드 소설적 요소 등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어느 맑은 아침에"라는 표현 다음에 오는 "터무니없이 긴 줄표가 개츠비가 소유한 선착장 끄트머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64) 운운하는 비평가의 지나친 의미부여는 다소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소설만 읽고는 알 수 없었던 여러 사실들도 나와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발표 직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겨우 2쇄를 찍은 후 서점에서 사라졌던, 그래서 피츠제럴드 본인이 출판사에 선물로 주문한 게 유일한 판매고였던 <위대한 개츠비>가 1940년 피츠제럴드의 사후, 미국문학의 금자탑으로 급격히 부활한 과정이 흥미로웠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대량의 문고판 책들을 인쇄하여 참전 중인 군인들에게 배부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15만 부 이상 미군들에게 읽혔고, 이는 1950년대 <위대한 개츠비>의 대중적 부활의 선구가 되었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부흥이 미군의 진중문고 보급이 1차적 계기였듯이, 국립예술기금이 시작한 '빅리드' 캠페인은 평소 대학에서 <개츠비> 강의를 하던 모린 코리건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게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나보다. 2004년 국립예술기금은 여가시간에 문학작품을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충격적 보고서를 접하고, '마을마다 책 한 권' 캠페인을 전개하는데, 이때 국립예술기금이 <화씨 451> <몰타의 매><앵무새 죽이기> 등과 함께 선정한 소설들 중 하나가 <위대한 개츠비>였던 것이다. 저자는 <개츠비> 강연을 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이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으며 그동안 내가 많은 책들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넘어가지는 않았나 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를 통해 <위대한 개츠비>와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가 "살면서 적어도 두 번, 또는 5년에 한 번씩은 읽을 가치가 있는 미국 소설"(18)이라고 말한다. 아마 내게도 <위대한 개츠비>가 평생을 두고 읽어야 할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