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불편러 일기 -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불편함은 없다
위근우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15년 무렵부터 인터넷에서 이른바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는 영어 단어와 "불편(不便)"이라는 한자 단어, 그리고 영어 접미사 "-er"을 조합한 말이다. 해석하자면 "매사에 불편해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될 것이 없는 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한국 사회의 여러 문화적, 사회적 현상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해 온 위근우의 <프로불편러 일기>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프로불편러"를 자인하는 저자는 "지금 이곳에서 프로불편러는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에 대한 자기긍정의 표현이다"(4)라고 말한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불편과 불합리(不合理), 부당(不當)은 각각 다른 개념이 아닌가? 불합리함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지만, 불편함과 부당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편함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고, 부당함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원칙의 문제다. 이른바 "프로불편러"의 문제는 불편함과 부당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부당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사례로 말하면, 가수 아이유의 노래 <제제>가 소아성애(pedophilia)를 연상시킨다고 느끼는 것은 불편함의 문제다. "아이유 노래는 소아성애 같아서 불편해"라는 개인의 감상에 대해서 "맞아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라고 공감을 살 수도 있고, "나는 안 그렇던데"라는 반론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관적 불편함을 사회적 원칙의 보편적 정의에 의거한 부당함으로 포장하여 음원 폐기까지 요구했던 사건은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 사회의 보편적 원칙으로서 통용되어야 한다는 유아(幼兒/唯我)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사회적 논의를 통해 고쳐져야 할 부당함이 단순히 개인의 불편함으로 축소되는 문제 또한 발생하고 있다. 사회에서 차별이나 억압은 정의(正義)에 어긋나는 부당함의 문제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에는 불편함이라는 말로 토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예로 나온 몇몇 연예인들의 예능에서의 폭언과 '막말(妄發)'은 불편할 일이 아니라, 부당하다고 시정을 요구해야 할 일이다.

물론 불편함과 부당함의 구분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부당함의 기준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사람들이 부당함을 호소하는 대신에 불편함이라는 개인의 감정 문제로 후퇴하는 이유는 부당함의 근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작업이 그만큼 지난(至難)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과 부당함을 같은 개념으로 퉁쳐서는 안 된다. 개인이 불편하게 느낌으로써 끝날 문제와 논쟁을 통해 부당함이라는 기준을 확립시켜야 할 문제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편함이라는 감정은 중요하다. 때로는 그것이 부당함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는 시발점(始發點)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내가 불편하다'는 주관적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불편함과 부당함을 구분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편함"이라는 장막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논리를 통해 그 문제의식을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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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7-30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과 불합리(不合理), 부당(不當)은 각각 다른 개념이 아닌가? 불합리함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지만, 불편함과 부당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持論)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편함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고, 부당함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원칙의 문제다. 이른바 ˝프로불편러˝의 문제는 불편함과 부당함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부당하다˝고 말하고, ˝부당하다˝고 말해야 할 때에 ˝불편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 불편함과 부당함(부당성)은 분명 서로 다른 개념이긴 합니다. 그 반대인 편함과 정당함(정당성)이 서로 다른 개념인 것처럼 말이죠. 헌데 따지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만, 정당함 · 부당함 혹은 정당성 · 부당성 혹은 justice · injustice 혹은 righteousness · unrighteousness는 무엇보다도 먼저 윤리학적, 법적, 인식론적, 정치(철)학적, 사회학적 기원을 지닌 개념이죠. 반면에 편함 · 불편함이라는 개념은 쾌 · 불쾌와 연관된 것으로서 감정적 · 정동적 심리 유형에 속하고 심리학적, 신경학적 기원을 지닌 개념이라 할 수 있죠. 이런 기원적 개념 분석이 있어야 혼동과 오용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당함 · 부당함 혹은 정당성 · 부당성 혹은 justice · injustice 혹은 righteousness · unrighteousness 같은 것들이 과연 자연 세계의 본질적 요소로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일까요? 또한 편함 · 불편함, 쾌 · 불쾌와 같은 감정적 요소들도 자연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한 요소들일까요?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위 개념들이 인간이라는 의식적 존재들이 구축한 인위적/인본적 체계의 일부라면, 본질적 의미에서 위 개념들은 명확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법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서로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도 쌍방의 개념들은 기원적 단계부터 상호작용적 영향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위근우의 『프로불편러 일기』에서와 같은 일상생활적, 문화적, 사회적 논의 문맥에서는 (개념적 엄밀성이 비교적 느슨하다고 볼 수 있는 논의 문맥에서는) 쌍방의 개념들이 서로 분리돼 있기는커녕 떼려야 뗄 수 없는 혼합적 일체로서 논의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윗글에서 의정부짱짱맨 님께선 《불편함이라는 감정은 중요하다. 때로는 그것이 부당함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는 시발점(始發點)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반대로 부당한 행위를 하는 자들도 윤리학적, 법적, 인식론적, 정치적 정당성을 요구하는 자들한테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죠. 이처럼 사회적, 당위적 차원의 정당함 · 부당함은 개인적, 주관적, 감정적 차원의 편함 · 불편함 혹은 쾌 · 불쾌와 기원적인 단계에서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죠. 다만 의정부짱짱맨 님의 지적처럼 이런 모든 논의에서는 《단순히 ‘내가 불편하다‘는 주관적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보고요. 그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의정부짱짱맨 2017-07-30 19:04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몇년만에 달린 댓글인지 모르겠네요ㅠㅠ)
본문에서 깊이 다루지 못한 불편함, 부당함의 기원(자연적, 인위적)에 대해서 길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제기해 주셔서 한층 더 깊이 있는 내용이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공동체주의보다는 자유주의에 가까운 입장이라서 정의(justice)와 선(goodness)을 구분하는 전제에서 글을 쓴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불편함과 부당함이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주관적 감정의 문제 보편적 원칙으로 수용되어야 할 문제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시로 드신 것처럼 불편함에도 부당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느끼는 불편함이 있는 반면에 부당한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불편함도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봤을 때 불편함은 나는 불편하다/안 불편하다는 상대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프로불편러 일기>가 엄밀한 개념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에도 동의하고, 책의 그런 부분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쓴 글은 아닙니다.
책 내용을 토대로 확장된 이야기를 해 보자는 의도에서 쓴 글이에요.
다시 한 번 길고 유익한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