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이의수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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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마흔이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도대체 뭐하고 살았나 싶고,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지금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지만 앞날도 과연 그럴까?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는 대한 민국의 보통 40대들의 삶을 너무나잘 그려내고 있다. 환경과 처지가 다르건만 에피소드에 나오는 인물의 심정에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조금은 배신감이 들었다.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일인칭 시점으로 수기처럼 자기의 삶을 풀어내기에 저자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평범한 직장인이 왜 이렇게 글을 잘 쓰지? 하고 책 앞 표지의 저자의 약력을 보아다. 아무래도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예전을 회상하며 적은 글인가? 너무 순진했나 보다.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처럼 수기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에피소드에 나오는 주인공 는 위태하고 간당 간당한 현실을 버텨내고 있었는데, 저자는 나름 화려한 스팩에 번듯한 직함을 가지고 있으니 배신감이 들 수 밖에 … … ,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공한 사람이 평범한 40대의 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고, 그런 분이 40대를 위해 일하고 있음이 감사하다. 늪에 있는 사람이 늪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맨 땅에 있어야 늪에 있는 사람을 구조할 수 있다.

 저자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우적되는 모든 40대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힘든 이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큰 위로를 준다.

 40대는 확실히 힘들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힘들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20대는 20대의 방황이 있고 30대는 30대의 고민이 있다 40대는 40대만의 짐이 있다. 어느 때나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삶의 짐에 힘겨운 것이다.

 자신을 평범한 40대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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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푸페이룽 지음, 한정선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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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시절 노장 사상에 매료 되었던 적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구나! 인생의 진리를 발견한 듯했다. 후에 노장 사상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후에도 그 사상의 심원함은 늘 내 마음에 향수처럼 남아 있다. 바쁜 일상에 파묻혀 지금은 그야말로 우연히 눈에 띄어야 한번씩 보게 되지만, 그 때라도 노자의 글귀를 읽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넓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노장철학은 내 마음의 고향처럼 자리매김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노장철학을 다룬 책들을 보면 왠지 마음에 끌린다.

 <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를 손에 잡은 것도 그런 향수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노장 사상을 다룬 책이다. 그러나 철학서라기 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노자의 자구를 설명하고 장자의 우화를 해설하기 보다는 삶의 한 대목에서 깨닫게 되는 노자의 지혜와 그와 관련된 장자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노장의 지혜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노자와 장자는 치열한 현대인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노장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면 도시를 떠나 산 속에서 도를 닦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일상의 경험에서 노장의 가르침이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으며,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현대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철학이 노장사상이 아닌가 한다. 과학만능주의와 자본주의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인위로 만들어진 현대문명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보다 척박하게 만들고 인간 관계를 파괴하며 인간을 고립시킨다. 행복하고자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행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 세상은 더욱 더 경쟁을 부추기며, 살아남으려면 안간힘을 쓰라고 채찍질한다. 그러나 노장은 한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관조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죽기 살기로 덤비지 않고서도 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는 노장사상이 출현한 춘추전국시대와 다름없어 보인다. 그래서 노장철학이 더욱 더 빛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노장철학을 익히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저자와 함께 노장 철학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며, 노장철학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노장 철학이 어떤 것인지를 소개해 주는 좋은 입문서라 하겠다. .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으면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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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암살 - 수학적 사고가 있다면 범하지 않을 오류들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5
클라우디 알시나 지음, 김영주 옮김, 주소연 감수 / 사계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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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 암살>은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통용되고(?) 있는 수학적 오류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수학적 오류를 많이 범하고 있는 가를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발견할 수 있는 오류들이 공공기관이나 언론 같은 공신력있는 기관에서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보다 심각한 것은 그 오류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인용되거나 답습되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저자가 모은 사례들을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것들도 있고, 재미있는 것들도 있다. 또 어떤 사례들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있다.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는 오류들을 살펴보면 단순히 수학적 사고의 부족이라기 보다는, 치밀함의 부족 혹은 사소한 오류나 오타 등에서 발생하는 것들도 많은 것 같다. 대체적으로 보면 수학적 오류라기 보다는 논리의 오류라고 할 수 있는 사례가 더 많다.(크게 보자면 논리도 수학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지만).  게다가 논리로 보자면, 저자 역시 큰 문맥에서 보기보다는 지나치게 숫자에 집착하여 맥락을 놓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경제에서 100퍼센트가 넘는 손실은 의미가 없는데 그것은 100퍼센트가 넘는다면 파산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금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에서 적자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축척된 자본이 많거나 복잡한 채무관계 등이 있다면 한 해 200퍼센트의 손실을 입었다 할 지라도 파산하지 않을 수 있다.  수학적으로는 저자의 지적이 옳을 수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오류라고 할 수 없다. 언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도 과도한 점이 보인다.  언론은 소수점까지 정확한 숫자 정보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신문은 경제지나 학술지가 아니다), 어떤 의미있는 사실을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중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소수점까지 정확한 숫자보다는  대략적인 수치가 훨씬 더 도움이 된다.(대중들 또한 정확한 수치에는 관심이 없다) 수학적 오류를 지적하려는 저자의 의도는 알겠지만 굳이 그런 내용들까지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런 지적들은, 특별히 학생들에게, 직관적인 생각이 수학적 엄밀성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에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수학 암살>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 책의 내용이 어떤 복잡한 수학적 기술이나, 수학적으로 빠지기 쉬운 함정들을 다루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였고, 초등학교 고학년 혹은 중학생 정도만 되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내용들도 대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수학을 싫어하고 왜 수학 공부를 해야하는지 회의를 품는 학생들에게는 좋은 자극제가 될 것 같다.

 이 책은 수학을 싫어했던 사람이나, 혹은 수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들에게는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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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비비어의 끈질김 -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존 비비어 지음, 유정희 옮김 / 두란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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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건강하고 지혜롭고 능력있고 안전한 삶의 뿌리이다"(p.182)


<끈질김>은 제목과는 달리 ‘인내’ 혹은 ‘오래 참음’에 대한 내용보다는 ‘은혜’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을 '은혜'로 바꾼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고 저자가 주제와 빗나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저자는 끈질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끈질김과 은혜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끈질긴 신앙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다. 반면에 우리가 은혜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내며, 끝까지 힘있게 헤쳐나갈 수 있다. 저자가 끈질김이라는 주제로 책을 썼으면서도 실제로 은혜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은혜를 단순히 구원의 선물로만 인식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은혜는 선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하다. 은혜가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우리가 은혜를 힘입는다면, 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으며, 당당하게 힘있게 살아가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가 곧 능력이라는 사실을 모른채 마치 은혜가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가 곧 능력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이전에는 감히 꿈꿀 수도 없었던 일들을 경험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증명하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설득하고 있다.

요즘 은혜에 대해 묵상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비록 어떤 부분은 동의할 수 없는 점도 있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은혜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았다는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며 은혜를 기대하며 살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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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브
존 맥아더 지음, 박주성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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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처럼 어떤 것들은 모든 말을 다 동원해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처럼 오히려 말이 그 본질을 훼손하거나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촌철살인(寸鐵殺人)’ 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 한마디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고 복잡한 문제를 간명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맥아더 목사님의 경우 슬레이브(slave)’라는 단어가 후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에게 슬레이브라는 단어가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영어 성경에는 대부분 ‘servant’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그 의미상 ‘slave’로 표현되어야 하며, ‘slave’라는 단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밝혀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극단적으로 만약 이 진실이 알려졌다면 굳이 내가 그 많은 책들을 집필할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사실 저자의 그 동안의 저서의 메시지는 ‘slave’가 가지고 있는 함축성을 충분히 설파하고 있다. 아니, 비록 slav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slave의 삶을 살라는 것이 저자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래서 저자는 slave라는 단어가 가지는 함축성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의 메시지는 결국 slave라는 단어로 모두 풀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slave가 비록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었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다지 큰 울림을 가지지 못한다. 영어에서는 ‘servant’‘slave’의 차이가 크겠지만, 우리 나라 성격(개역성경기준)에서는 주로 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나 노예나 거의 같은 단어이다.  ‘servant’가 영어권에서는 하인이나 종업원을 의미하기에 노예와는 상당히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 올 수 있지만, 우리말 번역 성경들에서는 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저자의 의도를 살린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주인님이라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 그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영어권에서 ‘slave’‘servant’로 왜곡된 인식이 우리 나라에서는 주인님라는 단어로 오도되고 있다. 사실 라는 단어가 주인이라는 뜻이지만 혹은 주님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쉽게 오르내리기 때문에 주님주인님이라는 인식을 못하는 것이다. ‘주님에서 주인님으로 바꾸어서 기도를 한 번 해보라. 우리의 기도가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말은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마치 하인에게 명령을 시달하듯 자신의 요구사항들을 내뱉는 기도를 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주인님이라고 말한다면 명령하거나 요구할 입장이 아니라 명령을 들어야 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여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들 것이다.

 이것이 사실 이 책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주인님노예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잊고 살아간다. ‘노예에게는 주권이 없다. 오직 주인님의 명령에 순종할 의무 만이 있다. ‘노예는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스스로 결정해서도 안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주인님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그러면 선하고 자비로운 주인님께서 그의 노예의 안전과 모든 쓸 것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렇게 명료하고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수 많은 문제들, 비록 그것이 삶에서 부딪히게 되는 복잡 미묘한 문제라 할 지라도, 우리가 주인님노예라는 단순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사라질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는 주인님께 물어보고 해결해달라고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점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한 때 열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미적지근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초신자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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