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세계사 - 지금의 세계지도와 역사를 결정한 59가지 전쟁 이야기
김성남 지음, 진선규 그림 / 뜨인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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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국지전적이긴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지역에서는 그칠날이 없이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모두에게 절망만을 안겨주는 전쟁이건만 인류는 끊임없이 싸움의 역사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인류 스스로가 전쟁이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종식시키지 못하는 전쟁이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전쟁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는데서 그 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의 역사는 역사 그 이전시대부터 적극적인 힘의 논리가 인간사회를 지배해 왔다고 볼 수 있으며, 힘을 가진자가 집단의 우두머리로 나타나고 그 집단은 힘의 대결에서 주위의 다른 집단을 정복해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이 전쟁의 역사이고 바로 힘의 논리 그것이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의 모든 분야가 집약된 대결의 장이 전쟁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쟁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놀라운 충격을 주었고, 더욱 놀라운 발전을 이룩케 하였다. 인류 역사상 전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시대를 앞서간 장비 못지 않은 전쟁영웅의 출현이다. 그것은 전쟁이 영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전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일면에서 신화를 남긴 사람들이 바로 전쟁 영웅이며, 수천 년의 긴 전쟁의 인간의 역사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영웅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책 <전쟁 세계사>는 그러한 전쟁에 관한 각종 이야기거리를 망라한 책이다. 이를테면 전쟁에 관한 기네스북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는 책인 것이다. 일곱 개의 장으로 나뉜 책 속에는 전쟁하는 사람들부터 전쟁의 도구, 전쟁하는 법 그리고 졸병과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 그리고 인류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전투에 대한 내용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각각의 장에는 그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전쟁의 흥미로운 숨겨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또한 서양사 위주의 기술에서 탈피하기 위해 중국과 한국사는 물론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전쟁까지 적절히 분배하여 알기 쉽게 전쟁에 대해 생각해볼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익살스런 삽화들은 사뭇 딱딱해지기 쉬운 내용들을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수 있도록 인도하는 작가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전쟁은 물론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그 양상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듯 하다. 로마는 현대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던 의회 만큼이나 군 역시 현대적인 체계를 갖추었던 것 같다. 그것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투철한 직업의식에서 시작한 로마군단의 힘이 바로 로마가 막강한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였으며, 십자군이 그토록 오랜 기간 용맹히 싸웠던 힘이 천국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었고, 에스파냐군이 적은 병력으로도 아즈텍을 정복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전쟁의 형태였던 것이다. 무기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커다란 요소중의 하나일 것이다. 원시 그대로의 돌부터 시작된 무기의 발전은 활과 화약 그리고 총을 거치면서 병력의 많고 적음으로 갈리는 전쟁의 기본 원칙을 깨어 버리고 만다. 항공모함과 스텔스기는 현대적인 무기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전술 역시 전쟁에서 빠질 수 없다. 역사상 빛나는 전투에는 그때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전술이 도입되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4장의 '전쟁사 속의 졸병일기'일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전투에 동원되었던 일개 병사의 흔적은 극히 미미할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전쟁영웅 뒤에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준 병사들이 존재했을 것이며 또한 모든 전쟁에 있어 그 실제 그 주도자는 병사들임이 분명할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그러한 배경에서 졸병일기를 끌어낸 모양이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동원된 병사와 막강했던 로마군단의 병사, 세계 최강의 군대 몽골 기마병, 미국 독립 전쟁시의 미국병사 그리고 이순신 장군 휘하의 조선 수병까지 전쟁을 앞두거나 힘들기만한 일상을 보내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으며, 결코 그들은 이름없는 병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쟁의 역사만큼이나 전쟁에 관한 연구 또한 오랫동안 인류의 커다란 관심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연구로도 전쟁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과연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 내지는 못했다. 결국 지금까지 그래왔듯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는 전쟁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피해를 줄여 나가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전쟁이 무엇이고 어떠한 형태로 계속되어 왔으며, 그러한 전쟁이 우리 인류에게 과연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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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행
시노다 세츠코 지음, 김성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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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가 외롭다고 느낀다. 나이와 세대에 따라 그 느낌의 강도는 물론 다르겠지만 근본적으로 그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을듯 하다.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가족을 이루고 그 울타리안에서 자그마한 행복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가족의 구성원중 어머니만큼 외로운 이는 없는듯 하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느라 바쁘다. 어쩌면 우린 그 누구도 어머니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성장하기까지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성장하여 독립된 사회의 구성이 되면서 어머니는 말할 수 없는 외로움에 빠진다. 결국 티끌 하나 없게 20여년이 넘게 집안을 쓸고 닦은 주부에게 남은 것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외감이다.

 

시노다 세츠코의 소설 <도피행>은 그러한 소외감을 겪고 있는 중년의 주부를 중심인물로 내세웠다. 이제 나이 쉰이 된 주부 타에코는 평범한 직장인인 남편과 어느덧 성장하여 직장에 다니는 두 딸 그리고 키운지 9년이 된 골든 리트리버 포포가 그녀의 가족이며 또한 전부다. 3년전 자궁적출 수술을 하면서 그녀에겐 약간의 우울증이 생겼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 그저 갱년기라며 그녀의 우울증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포포만이 말없이 그녀의 옆을 지켜줄 뿐이다.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났다. 포포가 이웃집 아이를 물어 죽인 것이다. 물론 원인은 아이에게 있었다. 장난감 총을 쏘고 후추가루까지 뿌려대며 끊임없이 포포를 괴롭히던 어느날 딱총을 포포에게 던진 것이다. 폭음은 포포를 두렵게 했고 포포는 패닉상태에서 아이를 물어 버린 것이다. 경찰의 조사결과 타에코에게는 아무런 과실과 형사상의 책임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분명 포포가 아이를 물어 죽인 것은 사실이었고 온갖 매스컴은 타에코의 정원에 까지 들이닥쳐 살인개가 아이를 물어 죽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아이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잇는 아이의 부모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순식간에 포포는 맹견이 되고 타에코의 집은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된다. 남편과 아이들마저 포포를 안락사시킬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타에코는 완강하다. 포포 역시 자신의 가족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에코의 선택은 포포와 함께 잠적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쉰의 주부 타에코는 늙은 개 한마리와 함께 가족과 사회로부터 도피를 시작한다.

 

"너 뿐이야."
대형견이긴 하지만 골든 리트리버는 분명 교배를 거듭하여 철저히 공격성이라는 개의 본능을 억제시킨 개량견이다. 타에코 역시 사람이 준 먹이만 먹고 떨어진 음식은 못먹게 가르쳤다. 마음을 주었기에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운전조차 못하는 타에코는 자전거에 포포를 싣고 도피를 감행한다. 우연히 얻어탄 트럭에서 물건을 훔치는 여자를 또다시 포포가 물고 그녀가 큰 부상을 입게 되면서 그녀의 도피는 이제 세상사람 모두가 알게 되어 버렸다. 남편이 노후 자금으로 마련한 돈은 그녀의 도피자금이 된다. 결국 그녀는 인적이 드문 숲속의 외딴 별장까지 이르게 된다. 천애고독하고 성격 까칠한 알 수 없는 도공 쓰쓰미가 유일한 이웃일뿐, 마을까지 걸어서 한시간 가까이 걸리는 외진 그곳에서 포포와 타에코 둘만의 생활이 시작된다.

 

도대체 타에코는 왜 도망쳤는가. 살인범도 아니고 지명수배자도 아닌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숨어 살아야 할까. 사실 타에코 혼자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포포에게 수갑을 채운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작가는 그녀를 끈질기게 쫓는 기자 다마키의 질문을 통해 그것을 묻는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궁금해 여기는 것 역시 타에코가 왜 도피를 감행했느냐의 문제이다. 더군다나 포포는 숲속에 살게 되면서 야성의 본능을 되찾아 간다. 스스로 사냥을 해 먹이를 해결하고 멧돼지를 공격할만큼 변해 간다. 다에코 역시 개는 개일뿐 휴머니즘이나 순수한 정신 같은 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타에코는 포포를 포기하지 않는다. 노화가 진행되며 급격히 힘을 잃어가는 포포를 보면서 타에코는 자신에게도 눈부신 청춘의 나날들이 있었음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남편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을때까지가 여자로서 산 시절의 전부였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성장한 딸들이 자신의 품을 벗어나면서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역할이 다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그녀의 삶과 포포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듯 하다.

 

늙은 개 포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타에코는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생각한다. 그 늙은 개의 마지막 남은 삶을 돌보기 위해 그녀 역시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버렸으니까...

 

타에코의 도피는 사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도 사람을 물어죽인 개는 그 자체로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타에코는 포포에게서 자신과의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 역시도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그즈음의 주부라면 누구나 겪는 인생의 한 단계이기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누구나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타에코를 통해 그러한 상황에 부딪혀 그 모든 것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주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타에코가 숲속의 집에서 발견한 검정콩은 그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그 집에 먼저 살다간 노부인은 스스로 작은 농장을 일구며 살아갔다. 현대판 고려장이기도 한 볕이 잘드는 2층 구석방에 앉아 며느리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TV나 보며 남은 삶을 보내는 것 보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했던 노부인의 삶을 검정콩은 대변하고 있는듯 하다. 타에코는 그렇게 힘을 얻고 포포 역시 그러한 주인 타에코의 마음을 아는듯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킨다. 아마도 죽어가는 타에코의 눈앞에 나타난 젊고 늠름한 개 포포의 모습은 가슴 가득 행복했던 젊은 날의 기억속으로 타에코의 마음을 이끄는듯 여겨진다. 그 행복했던 기억만을 간직할 타에코의 삶이 어쩌면 그녀에게는 후회없는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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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 조엘박의 한국교회 개혁시리즈 2
조엘 박 지음 / 박스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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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 대해 위기가 왔다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물론 그렇게 보여지기까지에는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종교라는 민감함 때문에라도 그것이 공론의 대상이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는 늘 한계가 느껴지곤 했다. 이미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교회 비판>을 통해 한국교회에 자성의 목소리를 촉구했던 조엘 박 목사는 이 책 <한국교회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를 통해 이제는 한국교회가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야 하며, 목회자와 신도 모두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 을 외치고 있다.

 

"지독하리만큼 한국교회를 사랑한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그 자신 역시도 한국교회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책을 집필했음을 이야기한다. 그 역시도 현직 목사이지만 그가 이러한 통렬한 비판을 하게 된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이미 구조적, 시스템적으로 한국교회가 이미 깊은 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으로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엄청난 배타성과 권력욕을 지적한다. 저자 역시 한국에서 오랫동안 목회활동을 해왔으며 그러는 동안 자연스레 그러한 시스템에 적응된채 그 문제점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호주에서의 선교활동은 저자 자신에게 한국교회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만들어주는 기회가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비판에 앞서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었음을 고백한다.

 

"한국교회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비신자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된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회자가 목회자답지 못하고, 교인이 교인답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중에서도 목회자의 세금 문제, 일부  목회자의 인격문제,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 세습 문제, 그리고 교회 안팎을 둘러싼 각종 부정부패까지 실제 우리 주위에 들려오는 목회자들의 대한 불신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으며,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이 그 첫번째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책은 현재 시점의 개신교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는듯하다. 초심을 잃고 자본주의의 생태에 익숙해져버린 한국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보면서 씁쓸한 부분을 감출수가 없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이 단순히 비판만으로 해결되어질지에는 의문이다. 교회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나 역시도 그러한 구조적 문제점들은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실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 역시 저자가 지적한 헌금문제나 교회건물 건축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느 정도는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비판은 오히려 반대급부를 양산하지 않을까란 우려가 든다. 예를 들어 1장에서 제기한 일부 정치목사들의 정치참여를 이유로 개신교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기에 그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 개개인에 대한 비판이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강요되는 헌금의 문제는 어쩌면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며 또한 교회의 존립에 최우선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문제이기에 계속되는 비판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제기를 통해 공론화되어 건강한 토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 대안중의 하나로 미리 1년분의 헌금을 스스로 정하고 그에 맞게 예산을 집행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자신이 속한 호주 교회의 헌금 시스템에 대해 언급하는데 우리의 사고방식에  비춰볼 때 그것 역시 그리 현실적인 방법이 되진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저자의 작은 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 역시 현실적으로는 어려워 보이기만 하다. 또한 작은 교회가 교회 자체의 목적과 본질에 충실하다는 견해는 저자의 주관적 의견이 짙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교회는 짧은 시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왔고, 그 모든 바탕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었다. 저자가 제안하는 것 역시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저자의 비판에는 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비판적 문제제기와는 달리 그에 따르는 저자의 대안은 힘이 부쳐 보인다. 그만큼 많은 대화가 요구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것이 그간 무조건적으로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려왔던 목회자와 신도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이가 한번쯤 숨을 고르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봐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저자의 메세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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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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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울은 세계 유수의 초거대 도시로서 세계적 차원에서 진전되고 있는 경제적, 문화적 교류와 통합의 주요 거점으로서 손색없는 발전을 해오고 있다. 또한 서울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전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과잉성장의 도시이기도 하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은 서울을 빼고는 아무 것도 논할 수 없을 만큼의 중추적인 기능을 서울에게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서울이 단순한 대도시라는 차원이 아닌 현대 한국 사회의 발전과정과 그에 따라 파생되어진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이며 또한 시대의 아이콘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 <서울은 깊다>는 그러한 우리나라 최대의 도시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와 고찰 이 이루어지는 책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살아 숨쉬는 역사를 접해봄으로서 서울이라는 도시에 묻어있는 우리들의 지난 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가 택한 접근 방식은 그저 통사적인 서울의 고찰이 아닌 우리들의 곁에 늘 있었던 친숙했던 소재들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의 깊이를 재려 하고 있다. 스물 여섯가지의 소재들은 이젠 오늘날 서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소재들이 상징했던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서울이란 도시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생활 그리고 당시를 지배했던 사고의 깊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의 상징이며 600년이 넘게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서울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계획 도시가 아니다. 서울은 과거 고려의 쇠락을 이끌었던 불교로부터의 단절과 함께 유교적 질서라는 새로운 이념을 내건 조선의 수도로서 새롭게 조영된 도시이다. 조선의 역성혁명을 이끌었던 정도전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무엇보다도 조화와 공존이라는 틀에서 서울을 게획하게 된다. 하지만 서울의 초기 조영게획은 정도전의 신권과 태종 이방원의 왕권이 부딪히고 권력이 태종에게 넘어가면서 대립과 갈등을 통해 부조화된 서울의 원형이라는 결과물 만을 남기게 된다. 이후 서울은 오랜 기간동안 그 틀을 철저히 유지해 왔고 조선왕조의 그것처럼 상당히 더딘 발전을 해왔다. 세속적 왕권의 신성화, 철저한 신분제를 앞세운 질서와 절제 등의 유교적 가치는 당시의 풍수적 공간관과 함께 중세 서울의 원형을 규정짓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이후 진행된 서울의 근대화와 현대화는 이러한 중세적인 원형을 변화시키고 깨뜨리면서 진행되기 시작한다.

 

조선후기 농업기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하는 생산력과 인구의 변동 그리고 개항 이후 외국인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건축행위, 대한제국 시절 황권을 상징하는 황도 건설사업등과 함께 서울은 그 중세적인 틀을 서서히 허물기 시작한다. 책은 산 위에 당당히 늘어서기 시작하는 서양 건축물에 주목하기도 한다. 첨탑이 달린 붉은 벽돌조 건물의 성당과 교회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도 불사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한 성도들을 무참히 학살한 조선왕실과 정부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을 저자는 '복수의 하나님'이라 표현하며 그것이 멋지게 성공했음을 이야기한다. 명동성당이 경복궁을 겨냥한 쇠뇌였으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때나 지금이나 극소수라는 점 또한 소개한다.
"높은 언덕 위에 높이 솟은 건물은 한편으로 동양의 세속 전제권력에 대해 서양의 신성권력이 승리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서구적 공간관이 '복수의 하나님'을 매개로 한국적 공간관을 패퇴시키고 서울을 점령한 셈이다."

 

서울의 영역은 확대되고 이전까지 그저 자연지형에만 익숙해 있던 전통적인 도로망은 점차 인위적인 격자형으로 변모해 간다. 시계탑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힘과 위력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전통사회의 건축물들을 위압하면서 근대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으며 서울의 외면적인 모습과 함께 그 안에 살고 있는 서울사람들의 의식구조 역시 근대적인 성향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한다. 어쩌면 서울의 근대 도시화를 이끌어낸 것은 조선사회 내부의 요구이기도 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을 결정한 것은 외부적인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울은 더욱 근대적인 식민지 상황에 적응하는 인간형을 양산해내는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책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해방 이후 '경성부'였던 서울은 하마터면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시'가 될 뻔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 시장의 노력에 의해서 서울이란 이름이 관철되었다고 하니 이승만은 자신의 호를 딴 도시에서 쫓겨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겪을뻔 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부자들이 거지와 같은 빈자들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빈대떡'과 뱀 잡는 사람들이 어떻게 '땅꾼'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그 연원이 밝혀지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인구'라는 단어 역시 그 연원이 나오는데 조금은 놀랍기도 하다. 조선후기 사람수를 셀 때 관리는 원(員), 양반은 인(人), 평민은 명(名) 그리고 노비는 가축과 합쳐 구(口)라는 표현을 썼고 인구란 인과 구를 합친 것이니 노비와 가축이 동급으로 취급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찌 사람을 가축과 같게 여겼는지 놀라울 뿐이다.    

 

현대 도시 서울은 그 역사 만큼이나 다양한 역사적 토대위에 서 있지만 근대 초기 도시 변화의 방향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이 남긴 흔적은 아직까지도 서울이라는 도시를 규정짓는 강력한 이미지로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그것은 어쩌면 방화로 인해 그 위용을 잃은 숭례문이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적 증거로 후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규정짓는 한가지 요소로 적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아 숨쉬는 서울의 역사를 통해 결국은 지난날과 오늘의 우리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당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모든 것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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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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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들의 인생에는 누구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성장통의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어른이 되기전 치러내야 하는 아픈 체험의 단계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이는 성숙해진 신체는 더이상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허락치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그안에서 자신만이 소외되어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옥죄어 오기도 한다. 때문에 학교라는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은 언제나 거부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늘 그랬던 것 같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 <개밥바라기 별>을 통해 자신이 겪은 아픔과 성장의 시간들을 조용히 되내인다. 그리고 그는 급격히 변하는 시대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했던 그의 젊은날을 통해 그는 우리들에게 하고픈 신나는 일을 하라고 외치고 있는듯 하다.
 

주인공 '유준'은 베트남 파병 직전 특박을 받아 잠깐 집으로의 외출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잠수함이라 이름붙여진 다락방에서 자신이 남긴 낙서를 바라보며 그의 젊은 날을 되돌아본다. 비록 지금은 몰락했지만 개화된 교육을 받은 그의 부모는 그가 도시의 빈민이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는 가난한 국밥집의 아들이었고 그런 그에게 세상은 서로 다른 두개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때부터 그는 교실안의 공상가가 되었나 보다. 답답하고 폐쇄적인 집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는 등산반이라는 특별활동반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호를 비롯한 여러명의 상급생과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을 통해 그는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얻게 된다. 그때까지 그들이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는 자식들이 그저 부모들이 겪었던 자신들의 인생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것이었고 학교는 그런 그들을 붙잡아두는 수단일 뿐이었다.

 

"저는 결국 제도와 학교가 공모한 틀에서 빠져나갈 것이며, 세상에 나가서도 옆으로 비켜서서 저의 방식으로 삶을 표현해 나갈것입니다..."
그는 장문의 편지를 그가 유일하게 믿던 국어선생 황새에게 보내고 학교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피투성이가 된채 군인들의 총에 쓰러진 중길을 통해 그는 세상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가슴깊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는 인호와 함께 북한산의 암굴로 들어가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하기도 하고 이후 그는 인호와 전국을 여행한다. 한달간의 여행은 이제 그가 더이상 소년이 아님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도 그는 이제 겨우 세상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해를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쩌면 젊은 날 우리들의 기억들 속에서 첫사랑의 떨림은 그 시절을 더욱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해 주는 모습이 아닐까. 미아 역시 태생적인 시대의 아픔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모두가 가난하기만 했던 시기 미아는 자신의 꿈 조차도 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동시대 여성들의 표본일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가정형편은 그녀를 결국 세상 속으로 흡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가 읊조렸던 말의 의미를 알았지만 결코 자신이 그 상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조용히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녀 역시도 현재의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준의 마음을 이해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많은 일들을 겪고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에겐 여전히 세상이 허깨비로 보였다.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 대위를 따라 그는 또다시 방황의 젊은 날을 보낸다. 전국의 공사판을 전전하기도 하고 속초의 오징어잡이 배에서 일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을 세상에 던진다. 신탄진 강변 땅거미질 무렵 초승달 옆에 나타난 밝은 별을 바라보며 대위가 이야기 한다.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 잘 나갈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때면 개밥바리기."

 

사춘기때부터 스물한살까지의 길고 길었던 방황은 그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작가 황석영은 그것이 그저 누구나 겪는 아픔과 상처라는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주로 시대를 관통하는 아픔과 함께 우리 민족만의 한이라는 정서를 그려낸 작품을 주로 집필했던 그에게 이러한 조금은 다른 식의 작품은 우리를 조금은 생경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든 겪어냈던 젊은날의 고민과 두려움을 기억하기에 이 작품 <개밥바라기 별>은 매우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작가의 말은 이 작품을 통해 작가 황석영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정형적이고 모든 것이 짜여져 있는 틀에 박힌 세상이라고 원망하기보다는 뭐든 도전해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삶의 방향과 가치를 체득해 나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던져진 또하나의 도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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