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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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울은 세계 유수의 초거대 도시로서 세계적 차원에서 진전되고 있는 경제적, 문화적 교류와 통합의 주요 거점으로서 손색없는 발전을 해오고 있다. 또한 서울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전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과잉성장의 도시이기도 하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은 서울을 빼고는 아무 것도 논할 수 없을 만큼의 중추적인 기능을 서울에게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서울이 단순한 대도시라는 차원이 아닌 현대 한국 사회의 발전과정과 그에 따라 파생되어진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이며 또한 시대의 아이콘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 <서울은 깊다>는 그러한 우리나라 최대의 도시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와 고찰 이 이루어지는 책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살아 숨쉬는 역사를 접해봄으로서 서울이라는 도시에 묻어있는 우리들의 지난 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저자가 택한 접근 방식은 그저 통사적인 서울의 고찰이 아닌 우리들의 곁에 늘 있었던 친숙했던 소재들을 통해 서울이라는 도시의 깊이를 재려 하고 있다. 스물 여섯가지의 소재들은 이젠 오늘날 서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소재들이 상징했던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서울이란 도시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생활 그리고 당시를 지배했던 사고의 깊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의 상징이며 600년이 넘게 수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서울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계획 도시가 아니다. 서울은 과거 고려의 쇠락을 이끌었던 불교로부터의 단절과 함께 유교적 질서라는 새로운 이념을 내건 조선의 수도로서 새롭게 조영된 도시이다. 조선의 역성혁명을 이끌었던 정도전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무엇보다도 조화와 공존이라는 틀에서 서울을 게획하게 된다. 하지만 서울의 초기 조영게획은 정도전의 신권과 태종 이방원의 왕권이 부딪히고 권력이 태종에게 넘어가면서 대립과 갈등을 통해 부조화된 서울의 원형이라는 결과물 만을 남기게 된다. 이후 서울은 오랜 기간동안 그 틀을 철저히 유지해 왔고 조선왕조의 그것처럼 상당히 더딘 발전을 해왔다. 세속적 왕권의 신성화, 철저한 신분제를 앞세운 질서와 절제 등의 유교적 가치는 당시의 풍수적 공간관과 함께 중세 서울의 원형을 규정짓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이후 진행된 서울의 근대화와 현대화는 이러한 중세적인 원형을 변화시키고 깨뜨리면서 진행되기 시작한다.

 

조선후기 농업기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하는 생산력과 인구의 변동 그리고 개항 이후 외국인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건축행위, 대한제국 시절 황권을 상징하는 황도 건설사업등과 함께 서울은 그 중세적인 틀을 서서히 허물기 시작한다. 책은 산 위에 당당히 늘어서기 시작하는 서양 건축물에 주목하기도 한다. 첨탑이 달린 붉은 벽돌조 건물의 성당과 교회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도 불사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한 성도들을 무참히 학살한 조선왕실과 정부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을 저자는 '복수의 하나님'이라 표현하며 그것이 멋지게 성공했음을 이야기한다. 명동성당이 경복궁을 겨냥한 쇠뇌였으며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때나 지금이나 극소수라는 점 또한 소개한다.
"높은 언덕 위에 높이 솟은 건물은 한편으로 동양의 세속 전제권력에 대해 서양의 신성권력이 승리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서구적 공간관이 '복수의 하나님'을 매개로 한국적 공간관을 패퇴시키고 서울을 점령한 셈이다."

 

서울의 영역은 확대되고 이전까지 그저 자연지형에만 익숙해 있던 전통적인 도로망은 점차 인위적인 격자형으로 변모해 간다. 시계탑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힘과 위력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전통사회의 건축물들을 위압하면서 근대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으며 서울의 외면적인 모습과 함께 그 안에 살고 있는 서울사람들의 의식구조 역시 근대적인 성향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한다. 어쩌면 서울의 근대 도시화를 이끌어낸 것은 조선사회 내부의 요구이기도 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을 결정한 것은 외부적인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울은 더욱 근대적인 식민지 상황에 적응하는 인간형을 양산해내는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책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해방 이후 '경성부'였던 서울은 하마터면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시'가 될 뻔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 시장의 노력에 의해서 서울이란 이름이 관철되었다고 하니 이승만은 자신의 호를 딴 도시에서 쫓겨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겪을뻔 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부자들이 거지와 같은 빈자들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빈대떡'과 뱀 잡는 사람들이 어떻게 '땅꾼'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그 연원이 밝혀지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인구'라는 단어 역시 그 연원이 나오는데 조금은 놀랍기도 하다. 조선후기 사람수를 셀 때 관리는 원(員), 양반은 인(人), 평민은 명(名) 그리고 노비는 가축과 합쳐 구(口)라는 표현을 썼고 인구란 인과 구를 합친 것이니 노비와 가축이 동급으로 취급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찌 사람을 가축과 같게 여겼는지 놀라울 뿐이다.    

 

현대 도시 서울은 그 역사 만큼이나 다양한 역사적 토대위에 서 있지만 근대 초기 도시 변화의 방향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이 남긴 흔적은 아직까지도 서울이라는 도시를 규정짓는 강력한 이미지로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그것은 어쩌면 방화로 인해 그 위용을 잃은 숭례문이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적 증거로 후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규정짓는 한가지 요소로 적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아 숨쉬는 서울의 역사를 통해 결국은 지난날과 오늘의 우리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당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모든 것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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