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
이중텐 지음, 박경숙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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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드디어 모든 중국인이 그렇게 기다리던 올림픽이 베이징에서 개최된다. 13억이라는 엄청난 인구를 통해 생성된 중국의 무한한 인적자원은 이미 중국을 더 이상 국제사회의 주변인이 아닌 중심축의 하나로 자리잡게 했으며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올림픽이라는 지상최고의 이벤트를 통해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려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은 냉담하기만 하다. 티벳사태로 촉발된 중국에 대한 반감은 실제로 이루어지긴 힘들겠지만 올림픽 보이콧이라는 말까지 심심찮게 들리면서 중국정부를 위협하고 있기도 하다. 성화봉송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는등 여러가지 움직임이 보이고 있지만 강경한 그들의 입장은 변화가 없고 쏟아지는 비난속에도 그저 묵묵부답일 뿐이다.

이렇듯 겉으로 외쳐지는 화합과 내부적인 강경함이 극과 극으로 표출되며 보여지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중국의 모습이다. 만약 우리의 입장이라면 올림픽 때문에라도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계속해 나가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속내를 알 수 없는 중국인의 일상생활과 문화관습을 결코 무겁지 않게 재미있고 재치있게 풀어낸 책이 바로 이중톈 교수의 이 책 <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이다. 이미 <삼국지 강의>, <품인록>등을 통해 현대 중국인의 교양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CCTV의 '백가강단'을 통해 스타강사로도 자리매김한 이중톈 교수는 자신의 나라 중국을 내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도를 이 책을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 함께 식사하고 함께 먹는다
저자는 중국에서 먹고 마시는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가 그저 그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함께 먹는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둔다. 음식은 생명의 근원이기에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같은 생명의 근원을 공유한다는 것이 된다. 즉, 형제, 동향, 인간관계, 인간과 신의 관계가 모두 먹는 것과 함께 먹는다는 것의 관계라는 의미가 된다. 함께 먹는 것을 통해 그들은 자기 사람이나 형제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떠한 청탁을 하려 할 때에도 돈봉투를 통해 전달되는 뇌물보다는 식사 초대를 통해 전달된 뇌물의 효과가 훨씬 더 크다고 한다. 결국 그저 단순한 거래보다는 함께하는 식사를 통해 그들이 하나가 됨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 중국인의 단체의식
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몇 년전 중국의 현지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얘기다. 중국의 값싼 인건비 때문에 생산라인을 중국으로 옮겼고 현지에서 바로 조립공정이 이어졌는데 그들은 각자 개인에게 하루에 정해진 양만 조립하더라는 것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작업속도가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먼저 끝낸 사람도 남들의 일이 끝날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기만 하더라는 것이었다. 보다 많은 생산을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한다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만약 오늘 자신의 분량을 초과하게 된다면 다른데 숨겨놓고 내일 쓰려고 할뿐 남의 일을 도와주지도 않더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저자가 말하는 중국인의 단체의식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목표보다는 다수의 대중을 따르는 것이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단체에 파묻히려는 그들의 습성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고 골머리를 썩을 필요도 없기에 그저 물결따라 흘러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단체가 최고인 문화에서 개인은 그저 미미한 존재이며 만일 잘못이 잇다면 그것은 단체가 잘못한 것이지 개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중국인의 논리 이기도 하다.

이러한 음식이나 의복 이외에도 저자는 체면, 인정, 직장, 가정, 결혼, 연애, 우정, 한담이라는 9가지 테마를 통해 중국인을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테마마다 저자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통해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며 그들의 신화부터 풍습, 속담, 언어의 유래까지 많은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그렇게 첨부된 요소들은 그저 그 테마들이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닌 학문적인 깊이가 있는 논리정연한 이야기로 들린다.

저자는 중국인이지만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없이 보다 객관적인 정연함으로 중국문화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려 한다. 그것이 '죽어도 체면'이니 '벌떼근성'이나 '획일화'니 하는 직접적이고 신랄한 비판일지라도 말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아홉가지 주제하의 모든 문화현상들은 모두 공통적 특징이 드러나고 있으며 결국엔 한가지로 귀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늘상 그네들의 주변에서 일어나지만 늘 보아왔기에 익숙하고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며 그것이 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정상적이며 보편하기에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고...

결국 이야기는 하나로 귀결되는 것 같다. 개인도 국가도 아닌 수많은 울타리들, 그들이 어려울 때마다 찾게 되는 얽히고 설킨 울타리들이 바로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단어가 아닐까. 그래서 저자의 이 한마디에 힘이 실려 보이기만 한다.
"중국의 현대화는 개인과 단체 사이의 단절에서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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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vol. 2 - 세상 모두를 사랑한 여자
야마다 무네키 지음, 지문환 옮김 / 엠블라(북스토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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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홀로 버려진다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할 누군가를 찾는다. 테츠야도 오카노도 그리고 아무런 사랑없이 무작정 따라나선 오오데라 까지도... 하지만 마츠코에게 세상은 계속해서 절망만을 안겨줄 뿐이다. 그녀가 힘들게 번돈을 오노데라는 모두 탕진해버렸고 그로 인한 말다툼끝에 마츠코는 그를 살해하게 된다. 그녀는 터키탕의 여자에 마약중독자에 살인자까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테츠야를 떠올리며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한 타마강 상수에서 테츠야를 따라 자살할 것을 결심한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소설의 1부 뒷표지 안에 새겨진 구절이다. 이 구절은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적인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마츠코와 또한 그녀가 사랑했던 테츠야의 삶 까지도 집약해 표현해보려는 의지를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자신이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 믿었던 테츠야였고 마츠코는 그의 연인이었기에 다자이 오사무와 함께 자살했던 그의 연인처럼 마츠코도 테츠야를 따라가려 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타마강 상류역시 자살하는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막기위해 물을 막아놓았고 마츠코도 결국 자살할 수가 없게 된다. 마츠코는 그곳에서 만난 이발사 시마즈와 잠깐이나마 행복에 젖어들지만 그녀가 저지른 살인때문에 교도소에 수감되고 만다. 교도서의 마츠코는 즐겁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시마즈를 생각하며 미용기술을 배우고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이어나가지만 정작 마츠코에게 돌아온 것은 시마즈는 물론 동생인 노리오마저도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 뿐이다. 그렇게해서 마츠코는 또다시 세상에서 버려졌다.

 

쇼는 생각한다. 마츠코 고모의 인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 흔하디흔한 비극이나 불행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곤 혼란스러워 하게 된다.
"마츠코 고모, 미안해요. 지금의 나에게는 이게 전부입니다. 조금 더 어른이 된다면 더 많이 이해해드릴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츠코의 흔적을 따라가는 쇼에게나 여자친구 아스카에게 마츠코의 삶은 가슴시린 성장통으로 다가선다. 그저 순리대로 혹은 정해진대로의 의미없는 생활을 이어가는 그들에게 마츠코는 새로운 의미를 지닌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렸다. 어쩌면 마츠코가 세상에 버려진 원인을 제공했던 류 마저도 받아들일만큼 그녀는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다, 하지만 류는 그러한 마츠코의 헌신을 오히려 두려워한다. 중학교때 짝사랑했던 선생님이며 천사라고 생각했던 마츠코가 그저 야쿠자의 일개 조직원인 자신에게 주는 사랑이 너무나 눈부셔서 아팠기에 또한 마츠코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기에 그녀를 뿌리치고 돌아선다.    

 

마츠코는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가끔 아버지와의 어린시절 추억이 묻어있는 이와이야 백화점의 옥상을 떠올린다. 그곳은 자신을 보고 마지막으로 웃었던 아버지의 기억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아버지는 병약한 동생 쿠미만을 생각했다고 마츠코는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긴 대학노트의 '오늘도 마츠코에게서 연락없음'이란 메모나 마츠코가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쿠미의 '언니, 잘 돌아왔어'라는 유언은 그녀에게는 가족의 사랑이 남아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다녀왔습니다'
1편에서 처럼 작가는 마츠코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표지속에 절묘하게 감춰놓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려준다는 것, 그것만큼의 행복이 세상에 또 있을까. 마츠코는 혼자 지낼때에도 가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에 들어오면서 '다녀왔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게해서라도 그녀는 외로움과 맞서려 했는지도 모른다. 소설에 직접 표현되진 않았지만 유골이 된채로 노리오의 품에 안겨 고향집으로 돌아갔을 마츠코의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이 그래서 여운이 더욱 진하게 남을 것 같다.

 

그저 사랑만을 바랬던 여자 마츠코, 또한 사랑을 베풀기만 했던 여자 마츠코 과연 누가 그녀를 누가 혐오스럽다고 할 것인지 또한 그녀가 정말 혐오스런 일생을 보냈는지 그것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남겨진 여전한 의문일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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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vol.1 - 모든 꿈이 조각난 여자
야마다 무네키 지음, 지문환 옮김 / 엠블라(북스토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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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가족과의 관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관계 그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각종 단체까지 우리는 그렇게 끈끈하게 얽혀진 사회속에서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관심이라는 단어로 표현될수도 있을듯 하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주고 아껴주며 나 역시 누군가에 대해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서로에게 더할나위 없는 큰 힘이 될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주위의 관심조차 없이 세상에 혼자라는 느낀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비록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무관심이라는 절망감에 빠진 한 여인의 일생을 그린 야마다 무네키의 이 작품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대면하게 된다.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쇼는 그나마 고향의 아버지와는 제대로 연락조차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그저 생각없이 하루를 보내곤하는 쇼에게 그나마 여자친구 아스카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위안이 된다. 그렇게 쇼가 하릴없이 지내던 어느날 쇼의 아버지가 유골함을 들고 갑작스레 찾아오게 되면서 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골함을 통해 쇼는 그 존재조차도 몰랐던 아버지의 누나, 즉 쇼에게는 고모가 되는 마츠코라는 여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아버지는 쇼에게 그녀의 아파트를 정리해줄 것을 부탁하며 돌아간다. 쇼는 며칠전 신문에서 보았던 기사를 생각하며 갑자기 유골함의 소리를 떠올리고는 웬지 차가운 기분을 느낀다. 만난적도 없고 존재조차 몰랐기에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아스카는 마츠코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카와지리 마츠코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한다. 시청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전형적인 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두살차가 나는 남동생 노리오와 어릴적부터 몸이 아파 집안에 누워있기만 하는 여동생 쿠미가 그녀의 가족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쿠미에게 쏠려있긴 하지만 마츠코는 자신이 노력하면 언제든 그것은 돌아올것이라고 믿으며 긍정적이고 즐겁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마츠코의 평화롭던 일상은 교장과의 수학여행 답사로 인해 깨지기 시작한다. 장및빛 미래만을 꿈꾸던 그녀에게 미리 계획된듯이 방이 없다는 핑계로 교장과 같은 방에 묵게 되고 거기서 겁탈을 당하지만 교장이라는 그의 권위에 눌려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고 만다. 불편한 학교생활이 이어지고 계속되는 수학여행에서 여관의 금고에 돈이 없어지고, 모두는 마츠코가 담임을 맡고 있는 학급의 불량학생인 류 요이치를 의심하지만 마츠코는 자신이 대신 절도죄를 뒤집어쓰면서까지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막아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막아보자 노력했던 절도사건이 끝내 학교로 알려지면서 끝내 그녀는 학교에서 파면당하고 집에서까지 나오게 된다. 

 

이렇게 소설은 전혀 다르지만 결코 뗄수 없는 두 개의 시선이 공존하면서 펼쳐진다. 지금 현재의 쇼가 남겨진 마츠코의 아파트를 정리하기 위해 방문하면서부터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게 되고 그녀가 관계했던 여러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녀의 삶에 대해 전해 듣게 된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마츠코의 삶을 직접 따라가며 마치 그녀가 지금 현재에도 살아있는 듯이 이야기는 펼쳐진다. 그렇게 그녀가 살았던 모습과 쇼가 전해듣는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절묘하게 오버랩되면서 두개의 이야기지만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연속성을 지닌채 전개되어 나간다.

 

집을 나간후 마츠코는 테츠야라고 하는 자신이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고 믿는 작가지망생과 동거를 하게 되지만 어려운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동생인 노리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노리오는 그녀가 걸림돌이라는 차가운 말만을 남기고 돌아선다.
"우리집에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나는 이미 우리집을 부숴버린 거야... 아버지도 그게 원인이 돼서 돌아가셨고, 나는 다시 한번 가족을 살려내야 해. 그러는데 누나는 걸림돌이야."
쓸쓸히 돌아가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테츠야의 죽음이었으며, 이어진 오카노와의 짧은 만남은 잠깐이나마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지만 결과는 더욱 깊은 절망감만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만다. 가족도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들마저도 모두가 그녀를 버렸다. 이제 마츠코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이다. 그녀는 이제 '터키탕 백야'에서 유키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난다.

 

쇼는 조금씩 마츠코의 삶에 접근해가면서 그녀가 강을 보고 울었다는 점에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마도 쇼 자신 역시도 강변에서 그러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강변에서 경찰이 마츠코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던 남자가 바로 류 요이치였음을 알고 놀라워 하게 된다. 과연 류는 어떻게 다시금 마츠코의 인생에 등장하게 되는 것일까.

 

표지에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커다란 제목아래 '모든 꿈이 조각난 여자'라는 조그마한 부제가 붙어있다. 마츠코의 불행한 삶을 그토록 잘 표현하는 구절은 더이상 없을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새로운 남자 오노데라를 따라 마츠코는 새 삶을 열려 한다. 하지만 쇼가 쫓고 있는 그녀의 삶은 불행만이 가득해 보일뿐이다. 도대체 누가 그녀를 혐오스럽다고 할 것인가. 그저 그녀는 세상에서 혼자이고 싶지 않았던 모두의 사랑을 갈구했던 여린 여인이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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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대답해주는 질문상자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이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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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발달하고 급속도로 빠른 정보화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들은 이제 적어도 과학적인 요소에서는 많은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냈고 또한 그것들은 이미 정답이라는 설득력을 얻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속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회현상과 인간관계 등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회속에서 살아나가는데 발생하는 많은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문에 부딪히곤 한다. 물론 그때마다 각자가 지금껏 터득해왔던 방법들을 이용해 그 의문들을 해결하려 하겠지만 우리에게 던져진 그 의문들은 어쩌면 애초부터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그 명쾌한 답을 쉽게 얻어내지는 못한 것 같다.

 

이 책 <무엇이든 대답해주는 질문상자>는 평소에 우리가 알고 싶었던 여러가지 의문들에 대해 일본의 시인이자 작사가로 유명한 다니카와 슌타로가 답을 해주는 형식으로 엮어진 책이다.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하며 질문의 분야 역시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뭔가 철학적 메세지를 요구하기까지 다양하기만 하다. 현명한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다니카와의 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동안 가졌던 몇몇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자리에서는 화를 내지 못하고 나중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는 질문에 대해서 그것마저 자신의 개성으로 삼으면 이후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이나 반대의견을 들었을때 흔들리는 마음을 갖기보다는 자신이 옳다라는 보다 건강하고 건설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대답은 질문에 대해 신중하게 답변하는 저자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귤, 수박, 달, 지구 등 왜 둥그런 것이 많냐는 질문에 대해서 '둥그런 것은 더는 손을 댈 필요가 없을 만큼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느낌을 준다' 는 어쩌면 철학적이면서 명료한 답을 제시하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적이나 신중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들보다 이 책을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조금은 황당한 질문들에 대한 저자의 유머넘치는 답변들이다. 자신은 죽기싫다며 사람은 왜 죽냐는 여섯살짜리 꼬마의 질문에 대해서 일단 같이 부둥켜안고 울겠다는 답이나 왜 매일 목욕을 해야 하냐는 스물여섯살짜리 아가씨의 질문에 대해서 어쩌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냐며 자신도 매일 목욕을 안한다고 답하는 저자의 재치넘치는 답은 실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저자 다니카와 슌타로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재미있긴 하지만 인생상담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 이야기 한다. 아마도 그것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질문에 대답해나가면서 저자는 기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웃의 마음을 이해하는 기분으로 답변을 작성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 책은 모두가 공감할 만한 답을 제시해주고 우리에게 보다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 인터넷 웹상에서 이 친절한 할아버지의 답변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니 뭔가 어려운 질문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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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아이라 재판소동
데브라 하멜 지음, 류가미 옮김 / 북북서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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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문명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선사한 것은 비단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시대를 아우르는 절대왕정의 틈바구니에서 민주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꽃피우기도 했으며 개인과 개인의 분쟁을 법정에서 해결하려 함으로써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전통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현재의 많은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만주주의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으며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현재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재판제도의 원형을 보여주기도 하고 있다. 이 책 <네아이라 재판소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전 아테네에서 벌어진 하나의 재판을 통해 우리에게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당시 사람들이 살아갔던 모습들이 결코 현재의 우리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사건의 개요에 앞서 우리는 아테네의 재판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의 재판제도와 같이 피고와 원고가 존재하지만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판사까지도 존재하지는 않는다. 대신 모든 분쟁의 해결은 최소 501명이상의 배심원들이 쥐고 있으며 그들 역시 추첨에 의해 선발된다고 한다. 피고와 원고는 주어진 시간내에 자신의 주장을 배심원들에게 전달해야하며, 재판의 승소를 위해 증인을 채택할 수도 있으며, '시네고로이'라고 하는 자신의 동료를 자신의 연설 시간 일부를 할애해 대신 연단에 세울 수도 있었다고도 한다. 또한 재판의 승자와 패자가 분명히 갈리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가해지는 벌금이나 형벌은 양측이 제시한것 중에 보다 합당한 쪽으로 선택되어졌다고 하니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상당히 합리적인 측면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이 사건의 소송을 건 원고는 아폴로도로스라고 하는 아테네에서 상당히 재력과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소송상대인 네아이라는 겉으로 이 사건의 피고이지만 정작 아폴로도로스의 맞상대는 네아이라의 남편인 스테파노스이다. 사건의 개요에 앞서 재판의 주요인물인 네아이라는 현재의 시각으로본다면 고급창녀이다. 매춘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산업 중의 하나이며 언제나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할 만큼 당시의 아테네인들에게도 남성들의 욕구를 풀어줄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네아이라는 그렇게 니카레테의 고급유곽에서 창녀로 길러졌고 창녀의 삶을 시작한다. 이후 네아이라는 사춘기가 막 지날무렵 새로운 주인을 만나 팔려나갔고 다시 이후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인의 몸이 된다.     

 

네아이라는 외국인임에도 아테네 시민인 스테파노스와 결혼생활을 유지했기에 아폴로도로스로 부터 고소를 당한다. 아테네의 법률은 외국인과 아테네 시민이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폴로도로스는 그러한 자신의 주장을 배심원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네아이라의 인생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도 거론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네아이라의 자식들인지 스테파노스의 자식들인지 아니면 둘 사이의 자식들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순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스테파노스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자식으로 간주되었던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아폴로도로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필요할 정도로 네아이라의 삶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네아이라 개인은 자신을 두고 벌어진 이 재판에 대해 자기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 참여조차도 못했고 그저 재판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만 있었어야 했을 뿐이다.  

 

아테네는 법정분쟁이 많기로 유명한 사회이기도 했지만 이 재판을 통해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인 원한때문에 상대방을 고소하기도 하고 법정으로까지 이끌어 내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자신과 함께 하는 친구나 친척 혹은 가족의 경우도 절대 예외가 아니었다. 이 네아이라 재판 역시 네아이라라는 개인보다는 원고측과 피고측인 아폴로도로스와 스테파노스간의 뿌리깊은 오해와 불신 원한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는 네아이라라는 창녀를 두고 벌어진 고대 아테네의 재판을 통해 그 시대의 사회를 읽는다. 그안에서 한 여인의 인권은 철자게 유린되어지고 발가벗겨진채 오로지 시기와 질투 그리고 대립과 반목이라는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코드만이 무성할 뿐이고 또한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함을 알려 주는 것같아 어쩐지 씁쓸한 마음만은 감출수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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